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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서 들리는 말이 아니었다. 틀림없이 입을 벌려 말한 것이었다. 노도인은 은발사내의 붉은 입술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귀인은 뉘시오?” 은발사내는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비틀었다. 지금껏 선기가 느껴질 정도로 온화하던 미소가 일순간에 여인네를 유혹하는 바람둥이의 그것처럼 화사하게 돌변했다. 한 줄기 서늘한 불안감이 운룡자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목을 뻣뻣하게 만들었다. 바로 그 순간 사내가 오른손을 내뻗으며 다시 말했다. “태을선의 부탁으로 그대를 기다렸다. 곤륜 장문 운룡자는 천계(天界)의 명을 받으라.” 제자들은 가슴 밖으로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감격과 흥분을 억누르며 곤륜이 깨지도록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운룡자는 꺼림칙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제자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인 가운데서도 옆으로 돌려 스승을 살폈다. 그때 은발사내의 오른손에서 그의 머리칼보다 더 반짝이는 빛이 일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주먹만한 구슬이 되어 오른손을 벗어났다. ‘아뿔싸! 이런 방심이---.’ “흩어져라!” 운룡자는 대갈을 터뜨리며 급히 오른발을 찍어 뒤로 몸을 날렸다. 그의 발끝에서 일어난 경력이 뿌연 눈안개를 일으키며 은발사내로부터 운룡자의 신형을 가렸다. 제자들도 그 기운에 놀라 몸을 휘돌리며 좌우로 튕겼다. 제자들의 주변에 있던 눈들이 허공으로 치솟으며 그들의 신형에 휘말려 눈보라가 되었다. 허공을 떠돌면서도 제자들은 뒤로 날아가는 운룡자와 그를 따라가는 하얀 구체를 확인했다. “사부님!” 하얀 구체가 눈보라를 뚫고 운룡자의 눈에 드러났다. 운룡자는 몸을 비틀어 하얀 구체의 궤도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순간마다 은발사내의 미약한 손놀림에 따라 하얀 구체 역시 방향을 전환했다. 운룡자는 당장 모아진 힘으로는 완전하게 펼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신에 미타금강기(彌陀金剛氣)를 일으켰다. 전신모공에서 실같이 뿜어져 나온 푸른 기운이 전면으로 모여들어 중앙은 뾰족하고 상하좌우로 부드럽게 휘어지는 방패 모양이 되어 그의 전신을 가렸다. 운룡자는 동시에 오른손검지와 중지를 모아 검결지(劍訣指)를 만들고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순간 그의 등에 걸려있던 검이 눈부신 푸른빛의 검신을 드러내며 검갑으로부터 벗어났다. 운룡자는 은발사내를 향해 오른손을 뻗음과 동시에 미타금강기의 앞까지 다가온 백색 구체를 향해 육양수(六陽手)를 내뻗었다. 청기로 둘러싸인 검이 은발사내에게로 빛살처럼 날아가는 순간, 백색구체와 이제 겨우 기세를 일으킨 육양수가 부딪쳐 섬광이 일고, 연달아 미타금강기와 부딪치면서 굉음이 산을 울렸다. 운룡자가 검결지를 유지하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가랑잎처럼 뒤로 날려갔다. 그 순간 막 은발사내의 가슴을 꿰뚫을 것만 같던 청검은 빛을 잃고 그의 왼손에 힘없이 내려앉았다. “사부님!” 허공을 맴돌던 일곱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 가운데 청룡구전(靑龍九轉)을 펼쳐 허공에서 연속적으로 회전하며 방향을 바꾸어 운룡자에게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나머지 다섯 제자들은 어느새 손에 검을 쥔 채 은발사내와 운룡자의 사이로 길을 막듯 내려앉았다. 쩌저저저저저적! 은발사내의 장환(掌丸)과 운룡자의 육양수가 충돌함으로서 발생한 굉음과 경기에서 기인한 충격파가 제자들이 땅에 내려서는 그 미약한 진동으로 인하여 표출되기 시작했다. 제자들의 발밑에서 길게 갈라진 얼음덩어리들은 연신 뿌지직 소리를 내며 조금씩 그 균열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고려할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바로 고개를 뒤로 돌려 운룡자의 안위부터 살폈다. 제자들이 서 있는 자리로부터 시작된 한줄기 혈선은 십여 장 뒤에서 두 제자들의 부축을 받은 채 주저앉아있는 운룡자의 앞까지 이어져 있었다. “허허허! 아무런 대책도 준비하지 않고 그 같은 근거리를 허용하다니---.” 운룡자는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힘든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사부님!” 두 제자의 외침에 운룡자는 힘겹게 눈을 떴다. “가거라. 너희들의 상대가 아니다. 가라.” 운룡자의 힘없는 눈동자에 안타까움이 드러났다. 가란다고 갈 제자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구대문파에 속하는 곤륜의 명성으로도 제자를 얻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세상 어느 도관보다 지리적 환경적 삶이 척박했다. 세상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속가의 지원을 받지 못하니 체면유지조차 힘들 정도로 곤궁했다. 그래서 곤륜제자들은 천하를 떠돌면서 유년을 박복하게 보내는 아이들 가운데 선연(仙緣)이 느껴지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어렵게 모았다. 집을 떠나는 것이 차라리 나은 형편의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고 고아도 있었다. 힘겹게 맺은 인연, 얼마나 애틋할 것인가. 제자들 하나하나가 운룡자를 사부면서 아비로 알고 살았고, 운룡자 또한 같은 심정으로 아끼고 키웠다. 그래서 운룡자는 더더욱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 사람이라도 살아서 벗어나 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오히려 분노에 찬 눈빛을 드러내며 은발사내를 노려보았다. 운룡자는 이빨을 질끈 맞부딪쳤다. 부서져 내릴 것만 같은 육신 구석구석에서 숨어있던 기력들을 찾아냈다. “물러서라.” 운룡자는 좌우에서 부축하던 두 제자들을 부드럽게 밀어내고 벌떡 일어서서 오른손을 뻗었다. 순간 오른쪽에서 부축했던 제자의 등에서 검이 튀어 올라 운룡자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은발사내가 또 다시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포기하지 않는군? 좋아.” 은발사내가 먼저 움직였다. 그러나 전혀 서두르는 기색 없이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길목을 막고 있던 제자들의 검에서 푸른 기운이 솟구쳐 오르더니 제각기 길이가 다른 검강지기를 형성했다. “비켜라!” 은발사내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히는 것과 동시에 운룡자의 입에서 사자후(獅子吼)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제자들은 명을 따르기 보다는 서로 비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이심전심! 그들 또한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은발사내를 저지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스승의 앞에 이르기 전까지 기력을 크게 소모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공통된 생각을 눈빛으로 확인했다. 그들이 일제히 앞으로 쏘아져 나아갔다. 운룡자의 눈에 다급함이 어렸다. 온전한 몸으로도 막아낸다고 장담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운룡자가 검을 떨치고 일어선 것은 먼저 죽는다면 누군가 하나쯤은 도주해 주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오히려 기세를 드높이고 있었다. 운룡자는 자신과 은발사내 그리고 제자들 사이의 거리를 눈대중해보고는 절망적인 눈빛으로 은발사내를 주시했다. 은발사내는 오장 앞까지 다가온 곤륜의 제자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상하군.” 은발사내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가 두 손을 바닥으로 비스듬하게 뻗었다가 삽질을 하듯 드는 시늉을 해보였다. 쿠쿠쿠쿠쿠쿠쿠쿠! 수만 년 동안 녹지 않고 부피만 늘여왔던 얼음덩어리들이 집채만 한 조각들로 깨지면서 허공으로 치솟아 제자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콰콰콰콰콰쾅! 하얀 얼음덩어리들과 푸른 검강들이 부딪치면서 부서진 얼음조각들이 은발사내를 향해 날아갔다. 은발사내의 전신에서 흐릿한 안개 같은 기운이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비수가 되어 닥쳐오던 얼음조각들은 그 기운에 부딪쳐 또 다시 가루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뿌연 안개가 되어 시야를 흐렸다. 쇄에엑! 은발사내의 수도가 허공을 저었다. 두 줄기 하얀 반달 같은 기운이 뻗어 나와 안개를 뚫고 오장의 공간을 갈랐다. 그 기운은 너무나도 쉽게 다섯 개의 푸른 기둥들을 잘라냈고 순간 아무런 소음도 없이 검강지기들이 소멸되었다. 다섯 개의 신형이 바닥에 내려섰다. 은발사내는 멍한 표정으로 서있는 곤륜의 제자들에게 미소를 보내며 그들을 스쳐지나갔다. 그 순간 은발사내의 뒤를 따르던 바람도 제자들을 스쳐지나갔다. 두 개의 수급이 바닥을 굴렀고 세 개의 상반신이 떨어졌다. 다섯 개의 핏줄기가 허공으로 치솟는 순간, “사형!” 운룡자를 부축했던 두 제자들이 울부짖었다. 그러나 운룡자는 오히려 차분한 눈빛을 드러내며 좌우로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기운이 소리 없이 흘러 나와 두 제자들의 옆구리를 밀었다. “누군가는 살아서 알려야 할 일. 살아 돌아가는 것이 수치는 아닐 것이다. 가랏!” 경사진 빙판 위를 주르륵 미끄러지던 두 제자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운룡자를 향해 붉은 고드름 맺힌 두 눈을 부릅떴을 때, 운룡자는 이미 삼장을 넘어선 푸른 빛 검강을 앞으로 내뻗으며 은발사내를 마중 나가고 있었다. 운룡자는 검과 하나 되고 가슴 속에서 터져 나오는 피눈물마저 기운에 보태어 은발사내의 가슴으로 뛰어들었다. 은발사내는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하얀 손을 검강지기를 향해 내뻗었다. 또 다시 하얀 구체가 튀어나와 검강지기와 부딪쳤다. 퍼버버버벅! 하얀 구체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아귀와 같이 검강지기를 씹어 먹었다. 삼장을 넘어섰던 푸른빛 검강지기는 결국 아귀의 식탐을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그 빛을 잃어버렸고, 아귀는 은빛 검신마저 아작아작 씹고 나서 검파를 먹고 마침내는 운룡자의 손과 팔마저 삼켜버렸다.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운룡자는 울컥 피를 토해냈다. 조각난 내장부스러기들이 곤륜의 빙의를 또 다시 더럽혔다. 은발사내가 엎어져 있는 운룡자의 머리 앞에 내려섰다. 운룡자가 안간힘을 써서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꼼지락거렸으나 한 마디 말조차 새어나오지 못했다. 은발사내가 운룡자를 향해 손을 뻗어 살짝 뒤집자 운룡자의 몸이 뒤집어졌다. 은발사내는 하늘을 보고 있는 운룡자의 얼어붙은 얼굴을 바라봤다가 처음으로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운룡자를 외면했다. 은발사내는 멀리 보이는 통천동의 입구를 바라보며 뒷짐을 지고서 차분히 말했다. “그대는 좋은 길잡이였다. 내가 원한 것은 그대가 아닌 곤륜검선 태을이었건만, 그는 이미 우화등선(羽化登仙)한 것 같더군. 들어가 보니 남아있는 것은 낡은 도복과 검 한 자루 뿐이었어. 할 수 없었지. 그대라도 죽여야 계산이 맞으니까. 하지만 이제 걱정은 접어둬도 좋아. 계산은 이것으로 끝이니 곤륜만은 더 이상의 피를 흘리지는 않을 거야.” 은발사내는 다시 운룡자의 얼굴을 직시했다. 그는 안도한 듯 눈을 감는 운룡자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등 뒤로 손을 뻗었다. 삼십여 장 뒤 얼음 위에 꽂혀있던 운룡자의 검이 줄을 달아 당긴 것처럼 은발사내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제자들이 돌아올까? 누군가가 그대의 죽음을 알려주면 좋겠지? 도와주지.” 다시 은발사내의 손을 벗어난 검은 운룡자의 가슴에 깊숙이 꽂혔다. 은발사내는 다시 검을 빨아 당겼다. 그리고 혈루를 흘리는 검을 보지도 않고 뒤로 던졌다. 검은 눈이라도 달린 듯 통천동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은발사내가 좌우를 둘러보았다. 운룡자에게 밀려 좌우로 날아갔던 두 사람이 붉어진 눈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쯧! 오는군. 사제간의 정리가 장하기는 하다만 그냥 도주함만 못하구나. 굳이 쫓을 생각은 없었건만---. 어리석어.” 은발사내는 뒷짐을 진 채 가만히 서있었다. “으아아아합!” 좌우에서 동시에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좌측에서는 검을 든 청년이 세찬 검기를 뿌리며 오장 앞까지 이르렀고 우측에서는 맨손의 중년인이 세찬 손바람을 일으키며 삼장 앞에 이르러 있었다. 은발사내는 먼지라도 털 듯 좌우로 수도를 휘저었다. 그리고 미련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곤륜산 통천하의 정상에는 이제 영육이 분리된 여덟 구의 한 맺힌 시신들만이 남아있었다. 하늘은 모르리라. 하늘이 자신으로부터 떨어져나간 곤륜을 보면서 서럽게 눈물 흘리는 동안, 곤륜도 애달파 가슴으로 울고 있음을. 곤륜이 남몰래 흘린 눈물 북으로 황하 되고 남으로 장강 되었음을. 을 시원(始原)으로 하여 금사강(金沙江)을 거쳐 청장고원을 벗어난 장강의 물줄기는 유비의 땅 사천의 천강지역(川江地域)에 이르러서 마침내 거대한 진면목을 드러낸다. 장강의 도도한 물줄기는 사천의 남단을 활 모양으로 휘어 흐르다가 귀읍(鬼邑) 풍도(豊都)에 이르러 급격히 빨라져 격랑이 되고, 기문(夔門)에 이르러 마침내 산을 쪼개어 물길을 튼 것 같은 삼협으로 다투어 빨려 들어간다. 지명와동(地鳴渦動)! 땅이 울고 물은 소용돌이치며 흐른다. 삼협을 관통하는 강물의 기세를 이름이다. 적절한 표현이리라. 금사강을 원류로 하여 사천의 고원지대에 이르러 민강(岷江), 아롱강(雅龍江), 가릉강(嘉陵江), 오강(烏江) 등의 무수한 물줄기들을 아울러 포용한 것이 장강이니, 그 수량(水量)을 어림짐작키도 어렵다. 그 많은 물들이 좁게는 이십 장, 넓어봐야 오십 장에 불과한 협곡을 가로지르니 서로 가겠다는 아우성은 형용하기가 쉽지 않으리라. 과장하기를 좋아하는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은 웅휘한 구당협(瞿塘峽), 수려한 무협(巫峽), 험준한 서릉협(西陵峽)으로 이어지는 삼협의 격류를 보면서, “하늘과 땅이 서로 물고 뜯으니, 강물이 빙빙 돌고 울부짖으며 거품일어 천지를 뒤흔든다.”라고 하였다. 이야기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귀성(鬼城)이 있다는 장강 연안의 풍도를 떠올리며, 귀성을 탈출한 귀신들이 환호하고 날뛰는 모양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 어떤 수식이 뒤따르던 간에 삼협의 진정한 구실은 사천의 사람들이 외부와 왕래할 수 있는 유일한 교통로라는 것이다. 아! 아찔하고도 험하여라. 촉으로 가는 길 어려워라 푸른 하늘 오르기보다 어려워라. 이백(李白)을 시선(詩仙)이라 불리게 만든 촉도난(蜀道難)의 한 구절처럼, 사천은 고원지대로 둘러 싸여 사방 어느 곳으로도 들어가기가 쉽지 않은 분지지형으로 되어있다. 안에서만 살아간다면 그 보다 좋은 곳은 찾기 힘드나, 외부에서 들어가기는 지난하여 가히 천혜의 요새라 일컬어도 모자람이 없으리라. 세상이 군웅들의 전쟁으로 피 흘려도 사천만큼은 별천지인양 평화로워서 유비는 그 힘의 열세에도 불과하고 안전할 수 있었고,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만난 당(唐) 현종(玄宗) 역시 촉도의 그 멀고 험한 길을 마다않고 촉 땅으로 피신했다. 검각산 험하고 높기도 높아 한 사람이 관문을 막으면 일만 명이 뚫지 못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