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19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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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 것을 만나면 뚫지 않고 돌아 흐르오. 결국 수심이 낮은 곳에서는 물과 맞닿는 지형과 어우러져 물의 변화도 심하오. 거기서는 물살들이 교미하는 뱀처럼 엮이고 꼬이고 비틀리지요. 그 상태라면 바닥에 선저가 닿지 않아도 배를 제어하기가 어렵소. 반면 물이 깊은 곳, 특히 지금 눈앞의 광경처럼 직선으로 뻗은 물길에서는 물살들이 나란히 흐를 뿐만이 아니라 그 속도 또한 빠르오. 일단 물살을 타기 시작하면 빠르고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는 것이오.” 듣는 것만으로도 물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운경산은 곽동량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자신이 이렇게 무력한 동안이라도 별 탈 없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운경산은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여유를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주변의 풍광이 미풍처럼 눈앞에서 흘러지나갔다. 운경산은 점차 안정되어가는 배의 움직임에 차분히 몸을 맡기고 두 손의 도움 없이 난간에 기대어 섰다. 그러나 그는 잊고 있었다. 곧 알게 될 것이라는 곽동량의 말처럼, 그 진의를 알게 되는 시간이 ‘곧’ 이라는 사실을. 협과의 인연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곽가의 원래 가업은 지금처럼 표국이 아니라 삼협을 오가는 여객들을 실어 나르는 운송업이었다. 그 탓에 곽자렴은 어려서부터 배를 탔고 약관 이전에 이미 누구 못지않은 조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배경이 없었다면 그가 용문수로표국을 시작해 볼 엄두도 내지 못했으리라. 그런 그도 오랜 만에 잡는 선타의 느낌은 생소하고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곽자렴은 최악의 조건 하에서 표물이 아닌 사람들을 최악의 장소까지 안전하게 데려가야 했다. 그러니 곽자렴의 뒤만 쫓으면 되는 곽동량과는 달리, 그가 느끼는 긴장감은 더 이상 당길 수 없는 시위처럼 팽팽할 수밖에 없었다. 배가 강의 중심에 진입함으로서 잠시 긴장을 풀게 된 곽자렴은 그때서야 겨우 운녹산과 운현산을 살필 여유를 얻었다. 좌우를 돌아본 곽자렴은 출항 전의 모습과 한 치도 다름이 없는 두 사람의 자세를 확인하고 감탄에 앞서 눈살을 찌푸렸다. ‘지독한 녀석들! 이만한 기상조건은 나로서도 몇 번 경험치 못한 것인데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구나. 배는 처음이라 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느끼는 공포는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아니라면 감당할만한 것이 아니다. 결국 녀석들은 내색하지 않을 뿐 공포를 초월한 것은 아닐 터. 쉽지 않은 일이군. 명가가 달리 명가는 아닌가 보군.’ 하지만 곽자렴도 두 사람의 손을 자세히 살피지는 못했다. 언젠가 누군가가 그들이 잡고 있는 난간을 본다면 크게 의아해 하리라. 왜 그렇게 찌그러져 있는지 쉽게 짐작하지 못할 테니까. 하얗게 변했던 그들의 손가락 끝마디도 어느새 제 색을 찾았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의식하면서 단 한 번도 서로의 상태를 살피거나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반 시진이 흘렀다. 어깨에 뭉쳐있던 압박감을 채 풀기도 전에 곽자렴의 눈에서 다시금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침착하려 해도 머리가 쭈뼛거리는 공포감은 쉽게 누그러지지 않았다. 곽자렴은 두 후학들이 좌우에서 지켜보고 있음을 알면서도 소리를 내어 심호흡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모자라 입술을 질끈 깨문 그가 낮고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이제 기문이오. 두 분께서는 조금 더 안전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자세를 낮추는 것이 좋겠소.” 운녹산과 운현산이 거의 동시에 서로를 응시했다. 그들도 느끼고 있었다. 배는 여전히 안정감 있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마치 무엇인가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안그래도 빠르다 느꼈던 배의 속도는 조금씩 더 빨라지고 있었다. 서로의 눈빛에서 흐릿한 공포감을 느낀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시선을 외면하고 전면을 직시했다. 확실히 강폭이 줄어들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협곡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물줄기는 울퉁불퉁 튀어 오르며 서로를 앞으로 밀며 안 가려고 발버둥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운녹산은 이미 찌그러진 배의 난간을 굳게 움켜쥐었다. 그때 운현산이 말했다. “형님! 내려서시지요.” 운녹산은 흠칫 놀라 운현산을 응시했다. 겁나면 내려가라는 말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서 흐르는 공포감이 그대로 운녹산의 가슴에 전이되고 있었다. 운녹산은 형님이라는 말조차 되새겨 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선미 높은 곳에서 내려서서 곽자렴의 맞은 편, 즉 선실의 후위 벽에 들러붙듯 주저앉았다. 그것도 모자라 삼성 공력을 일으켜 하체를 무겁게 내리 누른 두 사람은 동시에 곽자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곽자렴은 그들을 보지 않았다. 오로지 전면만을 주시하며 지지 않겠다는 불굴의 투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바람은 좋은 동풍. 이단까지 돛을 올려라. 단류노(斷流櫓)를 준비하고 북을 쳐라.” 곽자렴은 사자후를 터뜨리듯 힘차게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 속에는 지금 그의 눈빛에 흐르는 긴장이나 공포 등이 한 점도 드러나지 않았다. 듣는 순간 힘이 되고 용기가 솟구칠 구심점의 존재를 알리는 소리였다. 둥둥둥둥둥둥둥둥-----. 끼르르륵! 끼륵! 끼르르르르! 북소리와 함께 도르레 돌아가는 소리가 힘차게 들려왔다. “우오오오! 우오오오! 어이 차!” 십 수 명의 사내들이 동시에 힘을 보태어 기백을 드러내면서 연신 소리쳐 대기 시작했다. 삼협과는 반대 방향으로 돛이 부풀어 오르자 배가 뒤집어질 듯 휘청거렸다가 금세 자세를 잡았다. 운녹산과 운현산은 배의 속도에 갑작스런 제동이 걸렸음을 확연하게 느꼈다. 운현산은 기듯이 움직여 곽자렴의 발밑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곽자렴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돛은 꼭대기까지 오른 것이 아니라 중간쯤에 걸쳐져 있었다. 운현산이 생각하기에는 이상한 일이었다. 바람은 격류의 흐름을 반대하는 역풍. 돛이 크게 펼쳐질수록 바람을 많이 받아 배의 속도는 느려질 것이 아닌가. “곽 국주, 돛을 왜 중단까지 밖에---?” 배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그가 해야 할 질문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돛이 올랐음에도 또 다시 배의 속도가 조금씩 빨라짐에 따라 그가 느끼는 공포심도 커지는 지라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곽자렴이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어조로 말했다. “상단의 바람은 하단에서 받는 바람의 세 배. 잘못하면 밑은 격류에 휩쓸리고 위는 바람에 힘을 받아 작은 물살 하나에도 튕겨서 뒤집힐 수 있음이오. 대주! 지금부터는 이 늙은이의 정신을 산만하게 만드는 일을 하지 마시오.” 운현산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곽자렴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 순간 운현산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물살 하나하나를 살펴도 모자랄 지금 곽자렴은 아예 눈을 감고 있었다. ‘포기했단 말인가?’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운현산은 촌각도 지나지 않고 고개를 내저었다. 얼마 겪어보지 못한 곽자렴이지만 조금 전과 같은 기백은 처음 느꼈었다. 그런 기상을 드러낸 인간과 포기라는 말은 아무리 엮어 보려 해도 연관된 고리를 찾아볼 수 없었다. 운현산은 다시 곽자렴의 얼굴을 살폈다. ‘흐름에 자신을 동화시킨다는 것인가?’ 검을 쥐면 신체의 일부로 느끼는 경지에 이른 운현산이었다. 곽자렴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그 장엄한 기색이 신수합일(身水合一)에 이르렀음을 느끼지 못할 그가 아니었다. 조금만 침착했다면 처음부터 알아차렸을 일이었다. ‘그라면 믿어도 될 터.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방해하지 않는 것뿐인가?’ 운현산은 애초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운녹산의 얼굴을 마주했다. 운녹산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었다. 그것은 공포에 굴복한 눈감음이 아니라 곽자렴과 동일한 의미에서의 행위임이 틀림없어서 차분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런 녹산 형도---.’ 운현산도 문내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다. 아직 공식적인 발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운녹산이 소가주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운현산은 운녹산이 과연 소가주가 될 자격이 있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운현산은 그 즉시 자리로 돌아가 가부좌를 틀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쏴아아아아아! 촤! 촤! 촤! 격류가 흐르는 소리, 뱃전을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그가 물에 몸담고 있는 듯 크게 느껴졌다. 몸이 휘돌았다. 숨이 가빴다. 발버둥쳤다. 그러나 한번 빠진 의식은 거대한 뱀에 감겨 점점 더 깊이 빠져들 뿐이었다. 눈을 뜨고 싶었다. 그러나 무언가가 그의 눈을 꼼짝할 수 없이 짓눌렀다. 운현산은 의식 속에서 격류에 휩싸이는 몸뚱이를 포기했다. 발버둥칠수록 더 깊이 가라앉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편해졌다. 관조하듯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물소리 사라지고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른 몸뚱이는 구름조각처럼 물 위를 휘돌면서 두둥실 흘러 다녔다. 꼬이고 휘돌고 뒤덮여서 도대체 몇 줄기의 물살들인지 알 도리가 없었건만 허리를 감고 다리를 건드리며 가슴을 스치는 물살 하나하나가 낱낱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운현산은 관조의 범위를 넓혔다. 물 위를 떠다니던 그의 육신이 어느새 배가 되었다. ‘그래, 여기서 요 녀석을 넘으면---.’ 잘못된 판단이었다. 곽자렴은 조금 더 기다렸다가 운현산이 생각했던 그 물줄기가 아니라 그 다음에 따라오는 더 작고 안전한 물줄기를 타넘었다. ‘아! 그걸 넘었다면 그 다음에는 크게 흔들렸을 거야. 그렇지! 이번에 이걸!’ 그 즉시 배가 물결 하나를 넘었다. ‘옳지! 이번에는---. 어? 어엇!’ 그때 곽자렴의 목소리가 운현산의 귀를 두드렸다. “돛을 하단으로! 좌측 벽수판(壁水板)을 올려라.” 그 목소리가 얼마나 다급하고 격렬한지 운현산은 눈을 뜨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헛!” 두 마디 헛바람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운현산과 운녹산이 동시에 눈을 떴고 동시에 소리쳤던 것이었다. 노룡의 꼬리 같은 물결이 좌측에서부터 배를 덮칠 듯 허공으로 치솟는 순간 두 사람의 신형이 우측으로 한 자 가량 솟구쳤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풀렸던 천근추의 공력을 운용하여 몸을 갑판 위로 내리 누르고 손바닥으로 갑판을 후려쳐 몸을 좌측으로 이동시켰다. 순간 우측으로 뒤집어질 듯 기울어졌던 선체가 안정을 되찾았다. 왼발을 크게 좌측으로 내뻗어 천근추로 배를 내리 누른 자세를 유지하던 곽자렴이 흘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때 선수가 허공으로 급격하게 치솟았다. “천근추를 푸시오.” 곽자렴의 외침에 즉각 반응한 두 사람이 몸을 가볍게 하는 순간 뒤로 휘돌아 전복될 것 같던 배가 부서질 듯한 충격과 함께 다시 강물로 곤두박질쳤다. 운현산과 운녹산의 신형도 즉시 갑판에 맞닿았다. “아시겠소?” 밑도 끝도 없는 곽자렴의 물음이었건만 운현산과 운녹산은 눈빛을 번득이며 그 즉시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그때부터 싸움이 시작되었다. 인간과 광룡의 전투. 광룡의 분노에 따라 노도가 배를 비틀고 후려치고 삼키려할 때마다 운녹산과 운현산은 곽자렴의 행동에 맞춰 천근추를 시전하고 풀고 자리를 이동하며 사투를 벌였다. 콰아아아아아아! 광룡이 울부짖고----. 둥둥둥둥둥둥둥! 북소리에 맞춰 단류노가 광룡의 혈맥을 끊고----. 흐합! 곽자렴과 운녹산 그리고 운현산의 합일된 기세가 광룡의 기세를 억눌렀다. 그렇게 사투가 시작된 지 한 시진. 세 사람이 완전히 진이 빠져 녹초가 되려는 순간, 곽자렴의 최후의 기운을 모두 뽑아내어 사자후를 터뜨렸다. “운망계가 보인다. 우측 물줄기를 쉬지 말고 끊어라.” 세차게 흐르는 격류 속에서 지류로 방향을 트는 일은 배가 옆으로 뒤집히는 것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무모한 일이었다. 지금 곽자렴은 그것을 하려하고 있었다. 피곤에 찌든 운현산과 운녹산의 눈빛에서 한 줄기 강렬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분명 처음 타는 배였지만 곽자렴의 조정을 적극 도운 지금에 와서는 자신들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임을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이었다. 크게 흔들리는 와중에도 배는 조금씩 우측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었다. 운현산과 운녹산은 흩어졌던 기운들을 짜듯이 모아 순식간에 천근추를 펼칠 만반의 태세를 취했다. “북을 쳐라! 돛을 내리고 우측 벽수판을 올려라. 물 흐름을 끊어라.” 핏방울이 튈 것 같은 곽자렴의 명령이 어김없이 시행되는 순간 선타를 쥔 곽자렴의 손등에서 핏줄이 굵어졌다. 그와 함께 그의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어이 차!” 선타가 오른쪽으로 돌고 곽자렴의 오른발이 우측으로 크게 뻗어나가는 순간 배가 빠른 속도로 운망계로 방향을 틀었다. 순간 배의 우측 선면에 격류가 부딪치며 배가 우측으로 기우뚱거렸다. 그래도 배가 충분한 선회를 할 만큼 기울어지지 않았다. “합!” 순식간에 배의 우측으로 신형을 이동시킨 운녹산과 운현산이 동시에 기합을 터뜨리는 동시에 천근추를 극한으로 끌어올려 배를 내리 눌렀다. 뿌지지지지직, 소리와 함께 갑판이 뚫리며 두 사람의 신형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두 사람은 그 즉시 두 손을 호조(虎爪)로 만들어 선면에 박아 넣었다. 스르르르르르륵! 언제 그리도 거센 파도를 헤치고 다녔냐는 듯, 배는 속력을 줄이며 부드럽게 운망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것은 운망계의 물은 본시 삼협으로 합쳐지기 위해서 내려오고 삼협의 불어난 물은 운망계 속으로 빨려 들어감에 따라 두 물살들이 서로를 밀어내어 흐름을 없애버리는 특징 탓이었다. 곽자렴은 배를 좌초시키다시피 모래 둑 위로 얹고 선타를 놓으며 갑판 위로 엉덩방아를 찍었다. 운녹산과 운현산이 기듯이 갑판 위로 올라와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여유가 생긴 두 사람의 시선이 곽자렴에게 꽂히는 순간 곽자렴은 바닥을 기어 선미의 난간을 붙잡았다. 운녹산과 운현산도 갑작스럽게 생각난 후위선의 안위를 떠올리며 후다닥 뛰어 곽자렴의 옆에 이르렀다. 좁은 협곡 사이로 선수가 엿보이더니 어느새 배의 전모가 드러났다. 배가 우측으로 기울어지면서 밀렸다. 일순간 다시 중심을 잡는 것 같았다. 운경산이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어 도우고 있을 것임에도 그리 되어서는 안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 선체가 급격히 기우뚱거리다가 운망계의 입구로 머리를 디밀었다. “후!” 곽자렴 등 세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엇!” 그러나 배는 격류에 삼분지 일의 선체를 걸친 채 옆으로 나뒹굴었다. “갑시다.” 곽자렴이 몸을 퉁겨 모래 뚝 위로 떨어져 내리는 순간 세 사람은 이미 울퉁불퉁한 벼랑의 바위들을 차며 조금씩 뒤로 밀리는 후위선으로 다가갔다. 배까지 십 장 정도의 거리를 남겨두었을 때 갑판이 폭발하면서 푸른 청광이 연달아 솟구쳤다. 금의대원들이 반쯤 물에 잠긴 배의 갑판을 뚫고 튀어 올랐다. 그들은 난간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외치는 노수들을 하나씩 짊어지고 벼랑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에게 이른 운현산은 그 즉시 머릿수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쿠쿠쿠쿠쿠쿠! 선체가 삐꺽대다가 급기야는 묘한 소리를 내면서 점차 삼협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완전히 삼협까지 빨려간 배는 수차례 휘돌다가 조각조각 부서져 어느새 사람들의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이라는 아찔한 상상을 하며 선도선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인원수를 파악하고 배의 상태를 조사했다. 난간이 부서진 몇 곳과 운녹산과 운현산이 뚫어버린 갑판 말고는 배의 상태는 전체적으로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후위선에서는 삼협을 뚫고 내려오면서 노수들 열 하나가 사라져 버렸고 고수(鼓手) 역시 종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곽자렴은 붉어진 눈으로 무사히 돌아만 갈 수 있다면 죽은 자들의 가족을 위해 최선의 방책을 마련하겠다는 말하며 선부들을 위로했다. * * * 아무도 모른다. 그들이 언제부터 그곳에서 살기 시작했는지. 그들은 그냥 그곳에서 처음부터 살고 있었다. 그들은 알고 있다. 먼 옛날 그들의 조상들은 그들이 지금 살고 있는 곳보다 훨씬 넓은 지역에 걸쳐 살고 있었음을. 그들은 천성이 착한 사람들이었다. 방대한 지역을 소유하고 있었으면서도 오만하지 않았고, 서로 사랑할 줄 알았으며, 그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주신 신들을 경배할 줄 아는 경건함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들보다 조금 더 하얗고 코가 조금 더 큰 이들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터전의 한 귀퉁이에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을 때, 그들은 환하게 웃으며 맞이했다. 조금 더 하얗고 코가 조금 더 큰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하나 둘씩 찾아와서 이미 한 마을을 이루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땅을 줄여가며 함께 풍요로움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시비가 붙었다. 스스로 중화인(中華人)이라고 부르는 조금 더 하얗고 코가 조금 더 큰 이들은 원래부터 그 땅의 주인이 자신들이라며 더 많은 땅을 원했다. 더불어 사는 땅이니 함께 나누자고 양보도 해보았지만 조금 더 하얗고 코가 조금 더 큰 이들의 대답은 오만한 것이었다. “빌어먹을 미개인들아! 여기는 중화인들의 땅이다. 우리 땅에서 얼른 사라져라. 그렇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 자연신이 베풀어 주는 대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던 그들은 조금 더 하얗고 코가 더 큰 이들이 휘두르는 서슬 퍼런 도검과 창 앞에서 힘없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평야에서 쫓겨나고, 들판에서 쫓겨나서 결국에는 그들이 지배하던 땅 가운데서 가장 척박한 고원 위에 자리 잡았다. 그 땅도 여전히 넓기는 했다. 그러나 워낙 척박하여 신이 베풀어 줄 수 있는 것이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그들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고원을 내려와야 했다. 고원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살지 않는, 오직 그들의 조상신들만이 영면에 들어있는, 그 강가로 내려와 고기를 잡았다. 그러다가 그들은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역시 조금 더 하얗고 코가 조금 더 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으나, 그들의 현명한 조상신들이 경고했던 그들과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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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하시지요. 다만 하신에 대한 예에는 어두우니 그저 보고 따르기만 하겠습니다.” 곽자렴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리 연락을 해두기는 했지만 그래도 운녹산이 용신제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보이면 어쩌나 하고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만약 그러한 사태가 일어난다면 겨우 구해놓은 선부들이 부정 탔다며 승선을 거부하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 어느 쪽이 진짜인가? 그날과는 사람이 달라. 오늘만 같다면 동행하는데 있어 큰 갈등을 빚지는 않으리라.’ 곽자렴은 운녹산을 향해 크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다음 용신당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럼 부탁하오이다.” 곽자렴이 포권을 취하며 정중하게 말하자 석조사당의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화의 도복 차림의 네 도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신호로 주위에 있던 장정들이 달려들어 석조 사당의 문을 열었다. 사당이라고 해보아야 제단이 놓인 자리를 빼면 사람 대여섯 들어가기도 비좁아 재를 행하는 동안 사람들은 꼼짝없이 비를 맞아야 할 판이었다. 활짝 열린 대문 좌우에는 장강유하주(長江有河主) 삼협재용신(三俠在龍神)이란 대련(對聯)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고, 누각처럼 만들어진 사당 안의 삼층 제단 주변에는 형형색색 색등(色燈)이 서른여섯 개나 둘러쳐져 있었다. 또 제단과 사당의 사이에는 길이 아홉 치의 장등(長燈)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앞에는 정성스럽게 마련한 태가 역력한 제물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허술한 보관을 쓴 늙은 도사가 제단에 향해 허리를 접으며 향을 살랐다. 노도사가 품속에서 옥간(玉簡)을 꺼내자, 나머지 세 명의 중년 도사들이 각각 번(幡)과 선(扇) 그리고 학우(鶴羽)를 꺼내들고 늙은 도사를 따라 제단을 돌기 시작했다. “원시천존(元始天尊)께서 평안히 위무(慰撫)하시어 장강용왕신(長江龍王神)께 고하나니, 강에 계신 용왕신과 좌우사직(左右社稷) 신령께서는 망령되이 놀라지 마시고, 정도(正道)로 돌아오셔서 안과 밖을 깨끗하게 하시며, 신령님들의 가호를 비는 이 사람들이 무사히 다녀오게 하시기를 간절히 비오나니, 율령대로 급히 행하소서.” 도사들이 쉬지 않고 제단을 돌면서 제문을 음송하는 동안, 곽자렴을 필두로 하여 금의대는 물론 배에 승선하여야 하는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사당 안에 들어가 향을 사르고 절하기를 반복했다. 그들의 뒤로 아들의 안전을 비는 노부모와 남편의 무사를 비는 아낙네들 그리고 아비의 생환을 비는 아이들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예를 행하자, 어느덧 시간이 두 시진이나 흘렀다. 처음에는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던 몇몇 금의대원들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사람들의 간절함을 느끼며 스스로도 진심으로 빌기 시작했다. 특히 맛있게 보이는 제물이 가득 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잠깐의 한눈조차 허용하지 않는 아이들을 바라본 금의대는 자신들의 짧은 여정이 결코 단순한 뱃놀이가 될 수 없음을 확연하게 깨달았다. 비록 두 시진 반도 못되는 약식이었지만 어쨌든 용신제가 끝났다. 곽자렴이 도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동안, 용문수로표국에서 나온 아낙네들이 제물을 나누고 따로 준비한 용염면(龍髥麵)을 내어서 제의(祭儀)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권하였다. 금의대 역시 과일과 용염면을 받았는데, 이미 옷은 비에 젖고 그때까지 요기도 하지 못한 터라 그 누구도 사양치 않고 용신당 주변의 돌담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그것을 먹으려 했다. 운경산은 다른 사람에 비해 더 많은 양의 용염면을 받아와 운현산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말없이 젓가락을 들어 면을 휘저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 운현산이 막 면을 입에 넣으려다가 운경산에게 고개를 돌렸다. “왜?” “이게 우연이오, 필연이오? 비가 그쳤소.” 운현산은 하늘을 보는 대신 아무런 파문도 일지 않는 자신의 국수 국물을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옷은 흠뻑 젖어있고 비는 오는 지도 못 느낄 정도의 세우였는지라 따로 의식하지는 못했었다. 그렇지만 제가 끝난 순간 비가 그친 것은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었다. 운현산은 운경산의 얼굴을 마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왕이면 필연이라 해두자. 그래야 적어도 물에 빠져 죽을 염려는 하지 않지.” “그럽시다.” 운경산은 흔쾌히 대답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비가 그친 것을 길조(吉兆)라 여기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씹지도 못할 정도로 볼이 부풀어 오른 한 아이와 시선을 마주친 운경산은 천진하게 웃으며 용염면을 입에 우겨넣어 볼을 불룩하게 만들었다. 금의대는 북천표국으로 돌아가 용문수로표국에서 준비한 개인의 행낭에서 녹의를 꺼내 갈아입고 다시 포구로 나왔다. 넓은 선착장에는 칠장이 조금 넘는 듯한 배 두 척이 가볍게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고 함께 제를 지냈던 선부들이 양 어깨에 두 개씩 모두 네 개의 긴 노를 얹어 배에 올라타고 있었다. “경산 형! 노가 원래 저런 건가요? 오른쪽과 왼쪽 것이 다르네.” 이제 갓 스물이 넘은 듯한 앳된 얼굴의 운추산이 묻자, 사람들이 일제히 노에 관심을 두고 보기 시작했다. 물 속에서 물을 밀어내는 부위의 넓이가 달랐다. 오른 쪽 노가 현저하게 넓어 보였다. 운경산이 굵은 팔로 운추산의 목을 휘감아 조이며 말했다. “어휴! 자식! 쓸데없이 눈썰미도 좋아요. 네 녀석이 모르는 건 나한테 묻지 마. 알았어?” 운추산이 컥컥대는 소리를 내며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들의 앞으로 곽자렴과 운녹산이 다가왔다. 운현산이 주위를 환기시키자 순식간에 대오가 정열 되었다. 운녹산이 곽자렴에게 말했다. “말씀 하시지요.” 곽자렴이 운녹산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금의대를 대충 훑어본 후에 말문을 열었다. “그나마 비가 그쳐 다행이오만 어제와 그제 이틀 동안 내린 폭우로 강물은 평소보다 많이 불어 있소. 지금 여기서야 별 위험을 느낄 수 없겠지만, 일단 기문에 들어서는 순간 배가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할 것이오. 그러나 별 말이 없는 이상 동요하지 마시오. 목적지는 무협과 서릉협 사이의 운망계(雲望溪), 물길로 대략 오백 리 조금 못 될 것이고, 빠른 물살을 고려해도 두시진 이상 걸릴 것이오. 이 늙은이가 당부하고자 하는 것은 단 한 가지, 배 안에서는 신분을 불문하고 뱃사람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라달라는 것뿐이오.” 곽자렴이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운녹산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운녹산이 금의대를 두루 살피며 말했다. “알아들었을 테니 국주께서 하신 말씀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 보다시피 배가 두 척이다. 금의대주와 금의대의 반은 나를 따라 선도선(先導船)에, 나머지 반은 후위선(後位船)에 탄다. 바람이 동풍이라 지체 없이 출발한다 하시니 서두르도록!” 곽자렴과 운녹산이 돌아서서 선착장으로 향하자 음양쌍도가 그 뒤를 따랐고, 운현산이 금의대원 열 셋을 이끌고 뒤따랐다. 그들이 모두 선두의 용문비선에 승선하자 운경산도 나머지 대원들을 이끌고 뒤에 있는 용문비선에 올랐다. 눈에 보이는 것과 몸으로 느끼는 것에는 엄청난 격차가 있었다. 배의 흔들림이 중심을 흐트러뜨릴 정도였다. 운경산과 금의대원들은 본능적으로 하체를 무겁게 하며 겨우 중심을 잡았다. 그들은 놀란 심정을 얼굴에 과장되게 드러내며 서로에게 한숨을 토했다. “후아! 보통은 아니네. 경산 형! 대단하지 않아요?” 운추산이 배 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이는 노수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운경산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 노수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고리에 노를 거는 이도 있었고 밧줄을 푸는 이도 있었으며 자신의 허리에 묶인 줄을 난간에 묶는 이도 있었다. 운추산은 조심스럽게 이동하며 노수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이런 젠장 할! 십년 과부, 성난 좆 본 듯한 기세로세. 아차하면 용궁행이로다.” 장년 노수의 중얼거림을 들은 운추산은 킥킥 웃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 노수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의 눈에는 고요하기만 강물이었다. 왜 배가 흔들리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을 정도로 잔잔했다. “별 거 없어 보이는데요?” 운추산의 지나가는 듯한 물음에 장년 노수가 운추산을 흘끔 바라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강물은 깊을수록 고요하고 힘찰수록 파도가 없는 법이오. 저리 사람 불안하게 고요한 것 보면 삼협에서는 우리도 속 뒤집어지고 하늘이 노랗게 보일 게요. 삼협은 처음이오?” 운추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년 노수는 안됐다는 눈빛을 드리우며 혀를 차보였다. 바로 그때 앞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뭐라 하셨소? 우리보고 화물칸으로 내려가라고?” 운추산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곽동량과 금의대에서 가장 성질 급한 운명산이 한 자 거리를 두고 마주보고 있었는데, 운명산의 심사가 많이 뒤틀린 것 같았다. 살펴보니 선실 앞쪽에 나무판자가 들려있고 어둠 속으로 계단이 나있었다. 곽동량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어찌 할 수 없소이다. 갑판 위로 무게가 몰리게 되면 배가 쉽게 뒤집어지오. 평소라면 짐을 가득 실으니 그럴 일은 없소만 지금은 어쩌겠소? 앞쪽 배도 마찬가지 일 것이오.” 운명산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배가 뒤집어지면 그땐 우리만 용궁행이겠군.” 곽동량이 차분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여기서는 그럴 일이 없을 것이나 삼협이라면 좌초나 전복의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소이다. 그러나 삼협에서라면 위나 아래를 따로 구별할 필요가 없소. 다 함께---.” 그때 운경산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해? 아까 무슨 말 들었어? 다들 시키는 대로 해.” 금의대원들이 싫은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하나씩 갑판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장년노수가 운추산에게 말했다. “젊은이! 좀 갑갑하긴 하겠으나 거기가 오히려 덜 흔들릴 거요.” 운추산은 장년노수의 말을 위로 삼아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갑작스레 어둠의 세계로 들어선지라 눈뜬장님의 신세나 . “어이쿠!” 놀란 외침과 함께 크게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막 바닥에 내려선 운추산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십 수 년 동안 무공으로 단련된 사람들이 어둡다고 균형을 잃는다는 것이 우스웠던 것이었다. 운추산은 그러나 곧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확인했다. 조심스럽게 발을 들어 바닥을 더듬어 보니 밧줄 몇 개 널려있는 갑판과는 달리 배의 골조가 그대로 드러나 있고 군데군데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널려있었다. 운추산은 일단 어둠에 적응하고 나서 두 시진 동안의 말동무를 찾아보기로 하고 마지막 계단에 주저앉았다. 바로 그때 위에서 밝은 불빛이 내려왔다. “어이! 여기 불.” 운경산이었다. 운추산은 반갑게 호롱불 두 개를 받아들면서 말했다. “경산 형이 이렇게 반갑기는 처음이네.” 운추산은 받아든 호롱불 두 개 가운데 하나를 옆으로 건넸다. 호롱불이 어둠을 스쳐지나가며 금의대원들의 얼굴을 희미하게 밝혔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서 금의대원들은 두 개의 호롱불에 의지하여 대충 서로의 얼굴을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운경산이 대원들을 둘러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배가 크게 흔들릴 수도 있어. 불조심들 하라구. 잘못하면 물고기들이 화식(火食)이라며 좋아할 게야.” 조금 전 곽동량과 시비가 붙었던 운명산이 소리 질렀다. “부정 탄다, 이 자식아. 빨리 꺼져버려. 화식이라니---.” 운경산이 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허! 이 자식이라니? 일개 대원이 부대주에게 못하는 말이 없다. 떽! 근데 설익으려나?” 운명산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똥 기저귀 갈아가며 얼러 키운 게 엊그제 같은데, 머리 커졌다고, 쯧쯧쯧. 가르친 바 없거늘 저런 버르장머리는 누구한테 배웠을까? 아하! 누구를 탓하랴. 내가 잘못 훈도한 탓이거늘---.” “어? 뭐야?” 웃음을 터뜨리려던 운경산이 흔들리는 몸뚱이를 가누기 위해 다급히 계단을 잡았다. 배가 선착장을 벗어난 것이었다. 운경산은 급히 계단을 되짚어 올라서며 말했다. “난 맡은 바 책임이 있으니 어쩔 수 없으나, 형제들은 푹 쉬라구. 크크크!” 운경산이 갑판 위로 올라간 후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배가 강의 중심으로 들어가면서 보이지 않는 물결들을 넘는 와중에 심하게 울렁거리는 탓이었다. “어이 씨!” “어! 어!” 당황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두 발바닥과 엉덩이만으로 앉아있던 금의대원들이 두 손을 선저에 대고 급기야는 등을 바닥에 붙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만 당황하여 허둥대는 줄 알았던 금의대원들은 일제히 서로의 상태를 살피며 절로 붉어졌던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그렸다. 운명산은 계단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못된 자식! 푹 쉬라고?” 그러나 운명산은 운경산의 상태가 자신들보다 더욱 처절하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금의대와 떨어져 곽동량이 선타를 잡고 있는 선미의 왼쪽 난간에 기대어 섰던 운경산은 죽을 맛이었다. 배가 선착장에 대어져 있을 때는 절로 흘러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배의 흔들림이 묘하게 기분이 좋았고 동료들과는 달리 눈앞이 탁 트여 곧 장관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마저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운경산은 배가 떠나자마자 두 손의 자유를 잃고 말았다. 난간이 뿌드득 비명을 질러댈 정도로 꽉 움켜쥔 것도 모자라 입에서는 절로 “악!” 소리가 터져 나오려 했다. 정선하고 있을 때에는 그저 물이 흘러간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일단 배가 움직이는 순간 물이 곧 수백 갈래 물결들의 집합임을 깨달은 것이었다. 곽동량의 뒷자리는 경관 좋은 곳을 오가는 배를 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서있고픈 자리일 것이다. 비록 작은 선실에 가려 선수 쪽 갑판을 비롯한 배의 전모는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에 선수의 앞쪽 전경은 물론 후면까지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운경산은 원래라면 절대 볼 수 없는 선수 바로 앞쪽의 강물을 볼 수 있었다. 배가 한 물결 올라설 때마다 전경은 사라지고 눈앞에 하늘이 나타났으며, 그 물결 내려설 때마다 누런 강물이 코앞까지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부동심 운운할 때가 아니었다. 난간을 놓는 즉시 몸이 날아가 황톳물로 빨려들 것만 같았다. 속은 메스꺼웠고 머리는 빙글빙글 돌았다. 평소에 겁이라는 것을 모른다고 자타가 공인했던 자신이 공포심을 느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운경산은 입술을 깨물고 두 다리에 기운을 북돋아 꼿꼿하게 섰다. 조금씩, 조금씩 움직였다. 그리고 아예 선미의 높은 부분을 내려서 선실 앞에 이르렀다. 뒷모습으로 보던 곽동량의 얼굴이 정면에서 올려다보였다. 곽동량은 침착했다. 두 다리는 무쇠처럼 굳건하고 두 눈은 차분하게 전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곽동량은 따갑게 느껴지는 시선을 향해 눈동자를 움직였다. 운경산은 부끄러웠다. 금의대의 망신을 자신이 시키고 있다는 자괴감에 시선을 외면하려 했다. 그 순간 곽동량이 다시 전면으로 시선을 옮기면서 말했다. “처음이시오?” 고개만 끄덕이려던 운경산은 곽동량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했다. “그렇소.” 곽동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담력이구려. 이 정도의 흔들림이라면 자주 배를 타던 사람들도 바닥에 엎드리고 만다오.” “놀리시는 게요, 곽 대협? 당신은 꼿꼿하게 서있지 않소?” 곽동량은 선타를 좌측으로 조금 비틀고는 고개를 저었다. “난 그저 익숙할 따름이오. 내 나이 다섯에 배를 탔고, 여덟에 처음 타를 잡았소. 비록 선타를 놓기는 했지만 그 후로도 셀 수 없을 만큼 이 강을 오갔다오. 산악에서 자란 운 부대주도 몇 번만 오가다 보면 이 정도는 금세 익숙해질 것이오.” 운경산은 곽동량이 비웃는 것도 위로하는 것도 아님을 그의 어조와 표정에서 분명히 알아차렸다. 운경산은 순간 한 가지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렇다면 용신제를 지낸 이유는 무엇이며 선부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이오?” 곽동량이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곧 알게 될 것이오.” 그 순간 배의 요동이 줄어들었고 좌측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 있던 선체도 바로 섰다. 대신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곧 알게 된다는 말의 진의를 파악하느라 생각에 빠져있던 운경산이 갑작스런 변화를 반기며 선실 외벽으로부터 등을 떼었다. 그때 마침 곽동량도 전면을 응시하던 시선을 운경산에게 돌리며 전신에 깃들어 있던 긴장감을 풀었다. “이젠 올라오셔도 무리가 없을 것이오.” 운경산은 입술을 씰룩였다. 곽동량은 이미 자신이 무서워서 선미에서 선실 앞으로 내려섰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왕 들켰는데 아니라고 변명할 운경산이 아니었다.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처음에 서있던 자리로 올라섰다. “광룡처럼 요동을 치더니 어떻게 이런 변화가?” 운경산의 물음에 곽동량의 입술 끝이 미약하게 비틀렸다. 곽동량은 좌측 뒤쪽으로 손을 뻗었다. 운경산의 눈길이 따라갔다. 그곳에 선착장이 보였다. 곧 배는 전진한 것이 아니라 옆으로 움직인 것이었다. “강은 하나이나 강물은 수많은 물살들이 실타래처럼 꼬여 있소. 물살을 타면 배는 빨라지고 물살을 넘으면 요동을 치는 것이 당연하지요.” “허면 굳이 왜 이곳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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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어. 현산, 경산과는 다르게 키웠어. 하아! 이번 일이 약이 될 수 있으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을 텐데. 후우우! 하필이면 녹산과 현산(玄山)이라! 별일도 아닌데 왜 이리 불안하단 말인가? 과연 그들을 함께 보내는 것이 잘 하는 일인가?” 운검정은 이제는 굳게 닫힌 방문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믿어야겠지. 진즉에 소가주 자리를 내어주어야 했을 것을 괜히 미뤘어. 자질이 충분한 아이거늘 이상하게 현산이 걸려 미뤘더니 심란해지는구나. 쯧쯧!” 한편 조심스런 태도로 방문을 나선 운녹산은 홀로되자마자 어깨를 쭉 펴며 절도 있게 걸었다. 그리고 마루를 내려서서 닫힌 방문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아버님. 소자도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경산(庚山)이야 아버님 말씀대로 포용할 수만 있다면 그만한 아이도 없습니다만, 현산은 속에 감춘 것이 많은 녀석입니다. 그것을 아시고 경산, 현산이라 이름 지으신 것이 아닙니까? 저는 현산 그 아이가 부담스럽습니다. 맹목적으로 현산을 따르는 경산도 그렀습니다. 그래서 금의대를 택한 것입니다. 소자의 미래를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험이 필요하니까요.” 운녹산은 얼굴을 차갑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흥! 어미가 다르다는 이유로 동생들을 믿지 못한다면 난 내 자식에게 그런 형제를 갖게 하지 않겠다.” 운경산은 오른손을 등 뒤로 돌려 엄지를 세웠다. 그리고 등 한 가운데를 긁적이기 시작했다. “어이 씨, 꼭 긁기 힘든 데만 간지럽더라.” 운경산은 긁은 자리가 상처가 날 정도로 새빨갛게 되어서야 긁기를 멈췄다. 그리고 침상 끝에 나뒹구는 백의 무복을 걸쳐 입고 동경 앞으로 다가가 오른손으로 턱을 붙잡고 얼굴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허어! 그 놈 참 잘 생겼다. 누구시더라? 그렇지! 천북제일무가의 절세미남 운경산이 아니시던가. 크크크!” 동경에 비치는 사내다운 얼굴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은 운경산은 앞섶을 모두 여미고 탁자를 지나 검가로 다가갔다. 어지러운 방안의 모습과는 달리 검가에 얹혀진 사척 검은 한 치의 비틀림도 없었다. 검신의 중앙을 쥐는 운경산의 태도는 경건하기 그지없어 조금 전의 장난스런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 그러나 곧 이어진 말투에는 이미 진지함이 사라지고 없었다. “정말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야. 왜 검만 잡으려하면 등이 가려워지는 거야?” “그거야 네 녀석이 씻지를 않기 때문이지.” 등 뒤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경산은 경건한 태도로 검을 등에 맨 후에야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어렸다. “왔수?” 문가에 기대어 서있는 백의무복 사내는 인상이 운경산과 비슷했다. 굳이 다른 점을 찾으라면 키가 한 치 정도 작은데다가 사나이다운 운경산에 비해 선이 조금 가늘다는 느낌 정도였다. 그러나 크게 다른 점도 한 가지 있었다. 운경산이 대충 던져두었던 옷을 그대로 걸친데 반해, 문가의 사내는 한줄 구겨진 곳 없는 반듯한 차림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바로 운경산의 형이며 금의대주의 자리를 맡고 있는 운현산이었다. 운현산의 얼굴에도 흐릿한 미소가 감돌았다. 운경산이 문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근데 무슨 일이오? 막 자려던 참인데?” 운현산은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마당으로 내려서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많이 끼었는지, 달은커녕 희미한 별 하나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이었다. “음! 하늘을 봐서는 모르겠군. 그래도 잘 시간은 아닌 것 같은데?” 운현산은 운경산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앞서 걸었다. 운경산이 껑충 뛰어 운현산과 보조를 맞추며 말했다. “홀로 잘 시간은 아니오만 같이 잘 사람이 없는 외기러기니 어쩌겠소? 꿈에서는 나타날까, 내 각시여! 더도 말고 형수만큼만 되어라.” “네 이놈!” 짐짓 꾸짖는 듯 하나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내심 한 구석에서는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운경산의 나이도 이미 서른이 넘었는데 아직도 미혼인 것은 온전히 운현산의 탓이었다. 넘보던 경지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탓에 혼인을 마다하고 폐관에 들어 그 자신이 서른을 넘겨 일가를 이뤘으니, 운경산은 꼼짝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운현산은 운경산도 모르는 사이에 어른들끼리 혼담이 오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미안함을 털어버리고 애써 웃으며 다시 말했다. “더도 말고 라니? 그 이상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네 형수가 이번에 네 신부감을 찾겠다고 고향에 간다하는데 극구 말려야겠구나.” 운경산이 웃으며 말했다. “흥! 말리시구랴. 아니, 제발 말려주시오. 형은 모르시우? 여자는 말이오, 자기가 아는 사람한테는 절대 자기보다 예쁜 여자를 소개시키지 않는다 하더이다.” 운현산은 자기보다 예쁜 여자를 어디서 구하냐던 아내 봉운정(鳳雲精)의 말을 떠올리며 쿡쿡댔다. 그때 운경산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운현산의 옆구리를 찔렀다. “근데 무슨 일이냐구요? 전에 없이 한밤중에 모이라 하니 궁금해 죽겠소.” 운현산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대공자, 아니 형님의 명을 전해야 돼. 장강 이남으로 가게 될 모양이야.” 운경산이 눈살을 찌푸렸다. “빙혼귀(氷魂鬼)가?” 운현산이 정색을 하며 낮게 꾸짖었다. “놈! 말조심 하여라.” “큼! 알겠소. 근데 장강 이남? 무슨 일로?” 운현산이 운경산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탁탑참요검, 도적들에게 빼앗겼나보더라. 그걸 찾으러 가는 게야.” 운경산이 눈에서 불을 토하며 외쳤다. “어떤 개자식들이 감히 본가의 물건에 손을 댄단 말이오? 흥! 그놈들 정말 재수 없구나. 제대로 걸렸어.” 운경산의 입에서 으드득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동안에 두 사람은 이미 넓은 청석 마당을 지나고 몇 개의 대문을 지나 세가의 서쪽에 위치한 전각의 담 앞에 이르렀다. 담을 따라 걷다가 대문을 들어서니 전체적으로 흰빛이 감도는 대리석 연무장이 보이고 그 뒤로 크지 않은 전각이 보였다. 연무장에 삼삼오오 앉아서 이야기하고 있던 백의청년들이 운현산과 운경산에게 아는 체하자 그들도 청년들에게 웃어보였다. 운현산이 전각의 첫 번째 계단에 올라서서 돌아서니 청년들은 어느새 그 앞에 삼열 횡대로 도열하여 운현산을 주시하고 있었다. 운현산이 전체를 훑었다. 각 열마다 열 명씩이니 모두 서른 명이었다. 운현산이 이번에는 각각의 눈들과 마주치며 상태를 살폈다. “아픈 사람 없나?” 없다는 대답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운현산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갑작스럽긴 하다만 내일 우리 금의대는 대공자를 수행하여 장강으로 가게 될 것이다.” 운현산이 말을 끊었음에도 아무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다만 눈빛이 흥분으로 물들었을 따름이었다. 운현산이 다시 말했다. “가주께서 수년간 공을 들이신 탁탑참요검이 장강에서 수적의 손에 들어갔다. 아직 수적들의 정체는 밝혀진 바 없으니 긴 여정이 될 것이다. 곧 우기가 닥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천시와 지리에 맞춰 적절히 준비하도록.” 예라는 대답이 우렁차게 터져 나왔다. 운현산은 만족스런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다시 말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본가의 오행무대 가운데 우리 금의대가 처음으로 세상에 나아가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우리 금의대가 본가를 대표하게 된 것이다. 가문의 어르신들께서 우리에게 기대하는바 크실 것이고, 세상 사람들도 우리를 주시하게 될 것이다. 실망시키지 말자.” 말을 끝내고 운현산이 계단에서 내려서자 금의대원들은 만면에 환한 웃음을 머금고 옆 사람을 마주보며 오른손을 내뻗었다. 순간 그들의 손에 칼날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면서 연속적으로 경쾌한 소리가 터졌다. 파파파파파파파팡! 서른 명의 금의대원들이 하나같이 휘청거렸다. 그때 운경산이 계단으로 올라서며 말했다. “으이그! 무식한 놈들! 써먹을 데 없다고 동료들을 후려 치냐? 자식들아! 엿 같은 새끼들이 감히 본가의 물건에 손댔다. 어떻게 해야 되겠나?” 파파파파파파파팡! “죽여야지.” 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운경산이 활짝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렇지? 확실하게 본보기를 보여주자. 다시는 본가를 건드리는 놈들이 없도록. 해산!” 파파파파파파파팡! 또 다시 서로의 손바닥을 노리고 벽공장(劈空掌)을 날린 금의대원들이 서로의 어깨를 부딪치며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고서 흩어졌다. 운현산은 은은한 미소를 드리우면서 그들을 바라보다가 어두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두렵소, 형님! 무슨 뜻이오? 제발 우리의 능력만 높이 샀기를 바라오.” “뭐라구요?” 묵직한 미소로 동료들을 환송한 운경산이 운현산의 중얼거림을 언뜻 들은 듯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운현산은 순식간에 얼굴에서 어두운 기색을 지워버리고 활짝 웃었다. “난 아버님이 너를 두고 중석(重石)이라 부르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 이중인격자야.” “엉? 내가 왜 이중인격자요?” 운경산이 눈을 뚱그렇게 뜨자 운현산은 웃음을 실실 흘리며 걷기 시작했다. “그럼 아니냐? 모르는 사람들은 네 놈이 과묵하고 무서운 놈이라 생각하지. 네 놈이 마음 통하는 이들하고 하는 짓거리를 본다면 놀라 까무러치고 말거야.” 운경산은 묘한 웃음만 흘릴 뿐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운현산의 어깨에 팔을 얹어 힘주었다. 그그그그그그그! 육중한 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으며 운녹산은 운검정과 가문의 어른들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애마 비영(飛影)에 올라탔다. 그와 동시에 운현산과 금의대 또한 일사불란하게 말에 올랐다. 운녹산은 운가의 본전 격인 숭의전(崇義殿) 앞에 배웅 나온 본가 사람들을 훑어봤다. 중앙에 운검정이 보이고, 그 좌우로 세가의 어른들이 있으며, 그들의 좌측에 운검정의 부인이자 운가의 대부인인 경의상(卿義尙)과 둘째 부인 상취월(桑翠月)이 나란히 서있었다. 그 옆으로는 운녹산의 아내 목추경(木秋瓊)이 왼손으로 일고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소동의 고사리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 다섯 살 가량 된 아이의 볼을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또 한 사람의 여인이 어린아이를 안고 있다. 사람들을 훑어가던 운녹산의 시선이 목추경에게서 멈췄다. 그녀가 아름답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하얀 얼굴에 붉고 가는 입술은 어쩐지 고고함이 지나쳐 차갑게 느껴졌다. 운녹산의 시선이 살짝 비틀렸다. 또 다른 여인, 그에게는 제수(弟嫂)가 되는 봉운정이었다. 아름다움을 따지자면 목추경을 따라가기는 힘들리라. 그러나 그녀에게는 목추경에게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동그랗다가 꼬리가 살짝 쳐진 눈매에서는 포근함이 느껴지고 꾹 닫힌 입가에서 흐르는 엷은 미소에는 너그러움이 묻어나왔다. 목추경보다는 오히려 그녀가 운녹산의 어머니이자 가문의 살림을 도맡고 있는 경의상과 그 기질이 닮아 보였다. 운녹산은 금세 초점을 자신의 아이들과 아내 목추경에게로 돌렸다. 그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어렸다. 순간 목추경의 왼손을 붙잡고 있던 아이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목추경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운녹산은 목추경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짓고서 좌측으로 말머리를 틀었다. 음양쌍도(陰陽雙刀)가 따라 움직이고 그 뒤로 운현산의 금의대도 대문을 향해 말머리를 틀었다. 막 문을 나선 순간 운녹산이 문득 고개를 들어 먹장구름 가득한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운녹산은 얼굴을 살짝 찌푸리면서 왼손을 들어 볼에 묻은 물기를 닦았다. 운녹산은 앞을 본 그대로 운현산에게 말했다. “금의대주. 검각산을 벗어나기까지는 속도를 내야 할 것 같군.”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건조한 말투였다. 운현산은 낯빛을 흐리며 대답했다. “앞서시지요, 대공자. 보조를 맞추겠습니다.” 운녹산이 말 옆구리를 찍었다. 후두두두두두둑! 운녹산과 음양쌍도가 앞으로 튀어나가자 운현산이 손을 들어 앞으로 내뻗었다. 순간 서른두 마리의 말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운녹산의 속도에 보조를 맞추었다. 운현산은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진 운녹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굳이 금의대주라 부르실 필요가 있소이까? 그냥 현산이라 부르시면 아니 되오? 어찌 목소리에 한 올 감정조차 담아내지 않으시오? 형님이라 불러보려 해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운현산의 복잡한 심경처럼 그의 시선에 와 닿는 운녹산의 등은 점점 더 차갑고 멀게만 느껴졌다. ! 후두두두두둑!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는 경망스런 소고(小鼓) 소리처럼 느껴졌다. 곽자렴은 제룡당의 대청에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미간에 세 줄의 굵은 세로주름을 잡은 채 뒷짐을 지고 대청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때 표국 대문을 통하여 유지우산을 쓴 털북숭이 곽동량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버님!” 곽자렴은 곽동량이 우산도 걷기 전에 채근하듯 물었다. “어찌 되었느냐? 선부(船夫)들은 모두 구했어?” 대청으로 올라선 곽동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많으나 강물이 점차 불기 시작한 탓에 아무도 나서지 않으려 했습니다. 할 수 없이 두당 열닷 냥과 의창에서의 체재비 조로 닷 냥을 함께 지급한다는 조건을 걸고서야 선부들을 구했습니다.” 한 달 동안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노질을 한다 해도 세 냥 벌기가 힘든 세상이었다. 후하다는 용문수로표국의 신참 표사가 받는 월삯이 네 냥이었다. 사람을 태우고 강물을 따라 흘러가 한참을 놀다가 빈 배로 올라오는 그 한번의 운항으로 스무 냥을 얻을 수 있다면 재신(財神)을 만난 것이리라. 한 번 운항하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대가치고는 너무나 출혈이 컸으나, 용문수로표국의 발이라 할 수 있는 토가족 사람들 없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곽자렴도 전혀 아까울 게 없다는 어조로 말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야. 백 냥을 준다 해도 아깝지 않아. 헌데 천북표국(川北鏢局)에는 들려보았느냐? 준비할 것이 많을 텐데.” 곽동량은 품속을 뒤적이며 대답했다. “나가면서 들렸더니 막 전서를 받았더군요. 전에 왔던 세 사람과 금의대 전원이 온다 했습니다. 모두 서른다섯 명입니다.” 순간 곽자렴이 끙, 하는 소리와 함께 미간을 모았다. “금의대라 함은 젊은 아이들로만 구성되었다는---.” 곽동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예, 운가의 젊은이들로 구성된 오행무대 가운데 하나입니다. 소자가 알기로는 천북을 벗어나는 것이 이번이 --.” 곽동량도 걱정된다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곽자렴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경험일천, 패기만만 금의대인가? 그 패기, 지나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건 그렇고 나갈 때 알아봤다면 곽동량이 품속에서 꺼낸 종이를 펼치며 대답했다. “묘도(苗刀) 사십 자루, 한자 수통 쉰 개, 웅황(雄黃)과 백반(白礬), 유지 바른 녹의(綠衣) 각 오십 벌 그리고 우육포(牛肉脯)와 돈육포(豚肉脯) 기타 건량 열흘 치 등, 말씀하신 대로 빠짐없이 주문했습니다만, 급하게 모으는 바람에 삼천삼백칠십네 냥을 쓰고 말았습니다.” 곽자렴이 고개를 내저었다. “돈 걱정은 말라니까. 어차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물건을 잃었어. 표국을 내어달라 해도 아무 말 못하고 주어야 할 판이야. 이미 신용을 잃었는데 그까짓 돈이 문제일까? 표물을 찾을 수만 있다면 내 목숨도 내어줄 수 있어. 잊지 말아라. 저들이 아무리 까탈스럽게 굴어도, 아무리 고깝게 느껴지더라도 우리는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느니라. 어떻게든 표물을 찾아야 최소한의 면목을 세울 수 있는 게 우리 입장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아버님!” 곽동량이 머리를 숙이자 곽자렴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가는 오늘 밤이나 늦어도 내일 아침에는 도착할 것이다. 네 고생이 말이 아니다만 이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배를 한 번 더 점검해 보아라.” 곽동량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대청을 내려섰다. 곽자렴은 곽동량이 대문을 빠져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정한 하늘로 얼굴을 들었다. “하! 내일은 비가 좀 그쳐 주었으면 좋겠는데---.” 곽자렴은 문득 고개를 돌려 대청 뒤쪽에 뚫린 문으로 내가를 바라보았다. “아! 부인이 준비를 제대로 하고 있나 모르겠군. 정성을 다 하여도 모자란데---. 하기야 최선을 다하고 있으리라. 표국의 장래는 물론 우리 부자의 목숨까지 걸려있다 했으니 어찌 소홀할쏜가?” 곽자렴은 다시 뒷짐을 지고 대청을 빙글빙글 돌았다. 폭우와 어둠을 틈타서 남포현을 스며든 서른다섯의 인마는 조용히 천북표국으로 들어섰다. 잠깐 동안 호들갑스런 음성이 들린 후 지친 말울음 소리가 잦아들었다. 세 시진 후, 여명의 신은 세상 밝히기를 거부했으나 다행스럽게도 폭우는 세우(細雨)로 바뀌어 잠 못 이룬 몇몇 사람들의 갑갑한 심정을 조금이나마 다독였다. 천북표국의 빈방을 모두 차지했던 방문객들이 잠에서 깨어나면서 표국도 소란스러운 새벽을 맞이했다. 희한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표국 내가의 우물 앞에 삼십여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고차 한 장만 걸친 채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이런 제기랄! 어제도 비로 목욕했고 오늘도 그럴 텐데 목욕은 왜 하라는 거야?” 쫙! “아야야야야! 형엉! 뭐하자는 짓이요?” 운경산이 시뻘건 손바닥 자국이 난 왼쪽 어깨를 잡고 운현산을 노려보았다. 운현산은 한 바가지의 물을 퍼서 운경산의 어깨에 쏟아 부으며 말했다. “하신께 제(祭)를 올리기 위함이라 하지 않느냐? 잡스러운 말과 생각을 지금 이 시점에서 모두 씻어 내어도 효험이 있을까 말까한데, 웬 말이 그리 많으냐?” 운경산이 짐짓 고리눈을 치뜨는 운현산을 외면하며 중얼거렸다. “도적놈들 잡으러 가는데 제는---.” 운현산이 다시 손을 들자 운경산이 펄쩍 뛰어 물러섰다. 운현산이 준엄하게 말했다. “산에 가면 산 사람의 법도를 따르고 강에 가면 강 사람의 법도를 따르는 법이다. 만약 네가 이곳 법도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아버님의 뜻과도 배치되는 것이야. 네 말대로라면 도적놈들이 훔쳐간 탁탑참요검 또한 평범한 철검에 불과하지 않겠느냐?” 그 순간 벌거벗은 채 늘어서 있던 사내들에게서 달아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부대주! 산에서야 무서운 것 만나면 도망치면 되지만 삼협은 달라. 물귀신 되서 마누라 찾기 싫다구.” “경산 형! 하라면 하지 웬 말이 그리 많소? 난 어릴 때 물에 빠져 죽을 뻔 한 적이 있다구요. 얼마나 무서운데. 잔말 말고 몸도 씻고 마음도 씻고 욕념도 씻어 버리고 오로지 무사 안전만 빌란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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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비선은 우리 표국만이 가지고 있는 배다. 삼협을 오가는 사람들이라면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진데 아무런 흔적도 못 찾았단 말이더냐?” 곽동량은 곽자렴의 기대를 짓밟으며 또 다시 고개를 저었다. “서릉협에서 보았다는 사람은 몇이 있으나 거기서야 의심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의창을 넘는 것은 야밤을 이용한 것 같습니다.” 곽자렴은 다시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 살아 돌아온 장오 또한 선타를 잡고 있어 옷차림 외에는 제대로 본 것이 없고, 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결국 알아낸 것은 어피 같은 괴상한 흑의를 입은 수적들에게 당했고 토가족이 미리 알고서도 방조했다는 것뿐인가?” 곽동량이 덧붙였다. “아마도 불가피한 협박에 의한 것 같습니다. 장오의 말에 따르면 그날따라 평소에 늘 부르던 사공의 노래 대신에 비장함이 느껴지는 전사의 노래라는 것을 불렀답니다. 게다가 살 수 있다면 복수를 하겠다는 말도 했다하니, 부족 전체가 커다란 위협에 직면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느낌이 들지요.” 곽자렴이 눈을 뜨고 운녹산을 직시했다. 이제 사건의 전말은 대충 알았지만 무엇을 어찌 해야 할지는 오직 운가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운녹산은 곽자렴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그를 마주보지 않았다. 그로서도 수적에 의한 표물의 강탈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배가 전복되거나 좌초되어 표물이 모두 삼협의 격류 속에 빠졌다고 지레짐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예상과 다른 결과를 듣고 나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홀로 중얼거렸다. “삼협에 수적이라? 단순히 표물을 노린 것인가? 아니면 본가의 물건임을 알고 노린 것인가?” 고심 끝에 운녹산이 고개를 들고 조금은 한기가 풀린 목소리로 물었다. “토가족? 부족의 위치는 아십니까?” 곽자렴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수삼 년에 한번은 방문하지요. 어차피 산길이라 그쪽의 안내를 받지 않는다면 고생 좀 할 것이나 더듬다 보면 찾아갈 수는 있을 것이오.” 운녹산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이레면 본가의 사람들과 함께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그때 출발하도록 하지요.” 곽자렴이 깜짝 놀라며 튕기듯 일어섰다. “대공자! 토가족을 찾아가려면 삼협을 지나야 하오. 곧 장마가 시작될 터인데---.” 운녹산이 예의 차가움을 되찾아 쏘아붙였다. “좌초가 아니라 노략질 당했다고 지금 책임을 회피코자 하시는 겝니까? 표국이 하는 일이 운송만은 아닐 텐데요?” 곽자렴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노부가 걱정하는 것은 이 늙은 목숨이 아니오. 잘못하면 귀가의 인명 피해를 막심할 수도 있기 때문에 만류코자 하는 것이오. 허나 소가주가 한사코 그리 하겠다면 죄진 이 늙은이는 그저 따를 수밖에.” 운녹산은 딱딱해진 곽자렴의 어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포권을 취했다. “그럼 이레 후에 뵙겠습니다.” 운녹산은 곽자렴의 포권지례는 보지도 않고 찬바람이 돌도록 돌아서서 방을 벗어났다. 곽자렴은 운녹산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아직도 흐느끼고 있는 장오를 흘끔 바라보고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천하를 제압했다. 그러나 오직 한곳 첩첩 산줄기 속에 자리 잡은 천혜의 땅 촉(蜀)나라만은 어찌 할 수 없었다. 진나라는 고심 끝에 한 가지 꾀를 내었다. 진나라에는 금우(金牛)가 있어 하루에도 몇 차례씩 금똥(金糞)을 눈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었다. 소문을 들은 촉나라는 금우를 빼앗기 위해 빼어난 장사 다섯 명을 보내어 촉에서 섬서 땅으로 나가는 검각산에 잔도(棧道)를 놓았다. 그렇게 길을 만들어 진나라로 나아가려는 그때 진나라가 먼저 그 길을 이용해 촉나라를 점령했다. 후에 사람들은 다섯 장사가 놓은 검각산 잔도를 일러 금우고도(金牛古道)라 불렀다. 금우고도는 사천과 섬서(陝西)를 직접 잇는 유일한 길이서, 후에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출사표(出師表)를 내고 위나라를 칠 때도 이 길을 여섯 번이나 통과하였다. 사천성 성도에서 섬서로 가려하면 우선 면양현(綿陽縣)으로 길을 잡아 칠곡산(七曲山)에 이르러야 한다.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검각산 칠십이봉의 굽이굽이 험준하기 그지없는 협곡로를 지나 검각현(劍閣縣)에 이르면 곧 섬서성으로 이어지는 금우고도를 볼 수 있다. 사천과 섬서를 잇는 관문 검각현. 영웅호걸들이 저마다 왕이라 자칭한 난세에는 사천을 지키는 천혜의 요새였지만 천하가 하나의 황제를 받드는 당금에 이르러서는 그 전략적 중요성이 퇴색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당금에 이르러서도 검각현은 한 가문으로 인하여 영웅호걸들의 땅임을 천하로부터 인정받고 있다. 바로 천북제일무가 운가의 땅이 그곳이었다. 운가의 역사는 송나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하가 하나의 황제를 떠받들게 되자 힘없고 배경 없는 소수의 군인들만이 검문관에 남아 형식적인 치안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외적의 침략이 없다고 도적의 노략질마저 끊어진 것은 아니었으니, 백성들은 산줄기를 따라 근동을 노략질하는 도적들의 등살에 몸살을 앓을 수밖에 없었다. 소수의 군인들만으로는 도적들을 막아낼 수 없는 일이었으니, 죽음을 두려워한 주둔 병사들은 오히려 도적과 결탁하여 노략질을 방관하고 더 나아가서는 동참하여 도적들의 세를 불리는데 일조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그때 분연히 일어선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운가의 시조 운벽진(雲璧眞)이었다. 운벽진은 원래 당 현종이 안록산의 난을 피해 사천으로 몽진(蒙塵)할 때 군관으로 따라와 결국에는 검각현에 안주한 운씨의 후예였다. 그는 가문의 검법을 익히고, 검각산의 기묘한 기세를 타고 들어온 기인(奇人)으로부터 얻은 다섯 가지 무법(武法)을 얻어 그것을 가전검(家傳劍)에 조화시킨 숨은 고인이었다. 그가 검을 떨쳐 검각산 일대를 휘어잡고 있던 도적들을 단숨에 소탕하니, 사람들은 그를 벽력검협(霹靂劍俠)이라 칭하고 추앙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시작된 운가는 이제 사백여 년 십오 대를 거쳐 당금 사천의 사대세력 가운데 하나인 천북제일무가가 된 것이었다. 심소발인(心笑勃仁) 검명휘협(劍鳴煇俠) ‘마음이 웃으면 인이 드러나고, 검이 울면 협이 빛난다’는 편액의 글씨는 그 여백이 조금 박한 듯 하나 한 획 한 획마다 무인의 힘찬 기세가 느껴졌다. 그 아래 검가(劍架)에는 고풍스런 물소가죽 검갑에, 포효하는 맹호와 성난 청룡이 얽혀 태극의 문양을 이룬 검파가 멋들어진 사척 장검이 얹혀있다. 그 외 장식물이라고 할 만한 것은 검각산 칠십이봉을 담은 산수화 한 장이 걸려있을 뿐이지만, 구석구석 놓여있는 꼭 필요한 가구들은 담백하고도 단순한 멋이 느껴진다. 그 방 중앙의 대탁에 지금 두 사람이 마주 앉아있다. 편액을 등진 초로인은 온화한 가운데서도 위엄이 느껴지는 얼굴로 묵묵히 앉아있고, 그 맞은편에는 이제 막 남포현으로부터 돌아온 운녹산이 있었다. 곽자렴에게는 그토록 차갑게 굴던 운녹산이 조심스럽고도 공손한 태도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맞은편에 앉은 초로인은 바로 운녹산의 아비이자 사천 사대거두 가운데 한 사람인 운가의 가주 운검정이 틀림없으리라. 묵묵히 운녹산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운검정이 입을 열었다. “무리다. 너도 알다시피 곧 우기가 닥치면 삼협의 격류는 인간의 접근을 불허할 것이다. 탁탑참요검에 들인 공이 작다할 수는 없겠다만 그것을 위해 가문의 아이들이 무의미한 죽음을 당할 수도 있어. 검각산도 아직은 특별한 조짐을 보이지 않으니, 차라리 우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곽자렴에게 직접 회수해 오라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운녹산이 두 눈에 안타까운 심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대답했다. “아버님, 기다린다 해도 곽 국주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사천이대표국이라 하지만, 그것은 곽 국주가 좋은 안목을 가지고 적절한 길목을 차지한 탓이지, 그 세(勢)가 이대표국에 걸맞아 그런 것은 아니질 않습니까? 아버님께서도 만자강에 대해서는 들으셨지요? 젊은 나이에 이미 곽 국주에 필적하는 무공을 지녔다 했습니다. 그런 그가 표물을 지켜내지 못했는데, 곽 국주에게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상황으로 보아서는 협상조차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협상을 하겠다는 놈들이면 사람을 죽이지는 않겠지요. 시간이 길어지면 쫓기도 힘들어 집니다.” 운검정은 운녹산의 초조한 눈빛을 외면하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사실 운검정에게는 반드시 탁탑참요검이 필요했다. 육년 전부터 검각현 근동에서는 요상한 일들이 가끔씩 발생했다. 사람들이 사라지고 피 빨린 시신들이 발견되었다. 놀란 사람들이 요괴가 설치고 다닌다면서 검각현의 지주와도 같은 운검정에게 퇴치를 부탁해왔다. 운검정과 운가 사람들은 짐승의 짓이거니 생각하며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뒤로 사람들이 아예 갈가리 찢긴 시신조각들이나 뼈들을 증거를 들고 찾아오니 결국 조사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자주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한두 곳에서 일어나는 일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은 호환(虎患)이라고 여길 수 있겠으나, 목만 떨어져나간 시신이 발견되고 갈기갈기 찢긴 채로 발견되는 시신은 제법 많았으며 가끔은 삐쩍 말라붙어 목내이(木乃伊)처럼 보이는 시신들도 발견되었다. 운검정은 가문의 사람들로 하여금 사건이 자주 일어나는 곳을 조사하는 한편 밤마다 순찰 돌도록 명하였다. 그 일로 투입된 인원만도 모두 삼백여 명. 검각현의 지주이며 천북제일무가라는 가문의 명예가 걸린 이상 노소를 불문하고 참가시켰다. 그러나 두 달에 걸친 조사와 순찰에도 불구하고 요괴의 종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계속적인 순찰로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생한 사건 하나 외의 다른 사건은 종적을 감춰버려서 겨우 체면유지를 할 수 있었다. 가문의 사람들을 한없이 내돌릴 수는 없는지라 운검정의 마음은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평소에 친분이 깊던 무당의 장로 보천자를 초빙해서 검각산 일대를 살펴보게 했다. 두 제자를 대동하고 야심한 밤에만 연 사흘 검각산 칠십이봉 일대를 둘러본 보천자는 운검정이 듣기를 원치 않았던 대답을 확신하여 꺼냈다. “검각산에 요기가 감돕니다. 가주께서도 역사를 아시다시피 검각산은 인간의 피에 젖은 산이올시다. 그 살을 뜯은 짐승들과 그 피를 마신 나무들은 요기가 흐르지요. 거기다가 원혼들마저 한 수 거든다면 요물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검각산의 기세 또한 그렇습니다. 큰 산에는 신령(神靈)이 맺히고 작은 산에는 사기(邪氣)가 맺히며, 영산(靈山)은 빼어나고 요산(妖山)은 날카롭다 했는데, 검각산은 사귀요마(邪鬼妖魔)가 살기에 참으로 적절하지 않습니까? 창칼에 찢긴 살을 먹은 짐승이며 흘린 피로 목을 채운 나무들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요사한 기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빈도가 보기에는 오히려 요괴의 발현이 늦은 감이 있군요.” 그때 운검정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가조의 유시를 떠올렸다. 내가 낮에는 산을 갈아 받을 일구고 밤에는 홀로 검을 익히니 부족함이 없었을 때, 우연히 검각산을 돌아다니며 제를 행하는 선인을 만나 금련오엽진결(金蓮五葉眞訣)과 다섯 가지 오묘한 무법을 얻고 한 가지 부탁을 받았다. 선인께서 이르시기를, “검각산의 기세를 보아하니 후에 크게 요기가 성하여 인명을 해칠 것이라. 노도가 산을 돌아다니며 억울한 원혼을 달래기는 했으나 이는 미봉책(彌縫策)에 불과하여 언젠가는 다시 요괴들이 출몰하여 사람들을 상하게 할 것이라. 너의 자질이 돋보이니 노도가 전해 준 무법을 갈고 닦고 전하여 후손으로 하여금 불쌍한 사람들이 편히 살아갈 수 있도록 보탬이 되어라.” 하셨다. 그러니 후손들은 본가의 근간이 어디에서 왔는지 헤아리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선인께서 말씀하신 요사한 기운이 엿보이거든 민생을 안정시키는데 최선을 다하라. 시조의 유시를 되새긴 운검정은 보천자에게 방도를 물었다. 보천자는 지금으로서는 당장 해결할 방도가 없다했다. 요기라 하나 아직 요물로서 도통한 것이 아니니, 자신이나 운가 사람들처럼 기세가 강한 인물을 느끼는 순간 우선 몸을 숨겨서 쉽게 그 종적을 찾을 수 없다했다. 우선 할 수 있는 일은 요괴를 물리치는 천장인 탁탑천왕의 신당을 지어 요괴가 함부로 사람을 해치지 못하도록 제를 올리고, 산 구석구석에 도력이 깃든 검을 묻어 요괴의 도통을 방해하며, 나아가서는 그 검력에 상처입고 드러나는 요괴들을 퇴치해야 한다고 했다. 운검정은 가조의 유훈과 선인의 부탁에 따라 아낌없이 금전을 썼고 오년을 기다렸다. 탁탑참요검의 제작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잃었다. 금전적인 손실이야 용문수로표국에 떠넘길 수 있는 일이었지만, 언제 억눌러 두었던 요기가 성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다시 오년의 세월을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운검정은 첫째 아들이자 소가주로서의 자질을 검증 중인 운녹산의 초조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긴 시간을 바라보는지라 운녹산은 입술이 바짝 말라버리는 것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아비의 눈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초조하고 답답했던 게야. 무인이 무인답게 살 수 없는 한가한 시절이라 역량을 발휘해 볼 기회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지.’ 운검정의 무심한 얼굴을 보면서 초조함을 더해가던 차에, 마침내 시작된 운검정의 말은 운녹산의 마른 입술에 수분을 공급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좋다. 네 뜻대로 하여라. 소가주의 자리가 핏줄만으로 인정받고 또 그 권위를 세울 수 있는 자리는 아니지. 시조께서 내리신 유시를 받드는데 일조할 수 있다면 너의 앞날도 순탄할 수 있으리라. 그래. 누구와 함께 가겠느냐?” 운검정의 말이 진행되는 순간순간마다 입가에 맺힌 미소를 더욱 짙게 만들던 운녹산이 운검정의 시선을 느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말했다. “금의대(金義隊)면 되겠습니다.” 무심하던 운검정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운검정의 마지막 질문은 형식적인 것이었다. 애초부터 그리 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던 답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운녹산은 기대와는 다른 요구를 했다. 원래 운가의 젊은이들은 그 성정과 자질에 따라 오행의 성질에 맞춘 어느 한곳의 무대에 소속되거나, 가문의 전체적인 번영과 안정을 기하기 위해 무가 외적인 업무, 이를 테면 가문의 사업체를 관리하는 일이나 정보를 수집 등 주로 가문 내에서 활동하도록 키워진다. 목인(木仁), 화예(火禮), 토신(土信), 금의 그리고 수지대(水智隊)로 구성된 다섯 개의 무대 가운데, 금의대는 그 성정이 굽힐 줄 모르는 고집불통들로 한번 마음먹으면 반드시 해내는 강골들이 많았다. 그리고 성정에 맞게 운가의 오성귀원도법(五星歸元道法) 가운데서도 패도적인 성격이 짙은 백호참마검법(白虎斬魔劍法)에 뛰어난 자질을 지녔다. 그러나 운녹산은 원래 목인대의 대주를 지낸 바 있었다. 운검정은 얼굴을 찌푸린 채로 다시 물었다. “네가 잘 모르는 곳에 가서 일을 보아야 하니, 차라리 잘 아는 목인대나 수지대 아이들이 낫지 않겠느냐? 그것이 천시(天時)와 지리(地理)에도 적절할 듯한데. 그도 아니면 각대에서 몇 명씩 차출하여 필요한 때에 필요한 아이들의 도움을 받든지.” 운녹산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 생각을 아니 해본 것은 아닙니다만, 실전 경험이 별로 없는 아이들입니다. 힘든 시점에서 각 대별로 의견이 흩어져 우왕좌왕하느니 차라리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낫다 생각하며, 실력이 미지수인 도적들을 상대하는 데에도 금의대 아이들의 단호한 성정과 실력이 적합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운검정이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걱정은 다른 것에 있었다. 운검정은 잠시 생각한 끝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네게 일임하기로 한 이상 네가 뜻한 대로 행하여라.” 운녹산이 허락에 감사하는 뜻으로 고개를 숙이자 운검정이 다시 말했다. “내일 바로 출발할 테지?” “하루라도 빠를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 나가서 준비하여라.” 운녹산이 허리를 접어 절하고 방문을 열었다. “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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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 주먹으로 왼손바닥을 계속해서 후려쳤다. 그때 대청 아래쪽에서 초조한 눈빛으로 대문을 바라보고 있던 청의 무복 중년인이 초로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국주님! 저기.” 초로인, 용문수로표국주 곽자렴은 황급히 대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곧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허! 가장 늦게 오기를 바랐던 이들이 먼저 오는군. 되는 일이 없어.” 곽자렴은 대청을 내려서며 말했다. “내당에 손님 오셨다 이르고 재물당주(財物堂主)에게 대기하라 이르게.” 표사 한 사람이 급히 제룡당의 우측으로 달려가는 동안, 곽자렴은 청의무복 중, 장년인 셋을 이끌고 대문을 향해 걸었다. 활짝 열린 대문으로 막 세 필의 준마(俊馬)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이십대 후반이나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견무복 차림의 준수한 사내가 가운데서 앞서고 흑의무복 차림의 중년인 두 사람이 그의 뒤쪽 좌우에서 보조를 맞추며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마중 나오는 곽자렴 등을 확인하고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제룡당 앞에 뒤쳐져 있던 표사 세 사람이 급히 달려가 말고삐를 넘겨받자 사내와 두 중년인들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곽자렴 등에게로 다가갔다.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곽자렴 등이 먼저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어서 오시오. 운대공자(雲大公子).” 사내가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국주님.” 곽자렴은 눈을 감고 싶었다. 예의에 어긋남은 없으나 말 속에 성의(誠意)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칼바람이 스치는 듯한 한기마저 느껴졌다. 아무리 사내가 사천의 동북지역을 대표하는 천북제일무가(川北第一武家) 운가의 대공자라지만 곽자렴 또한 작으나마 일문의 수장,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지금 곽자렴의 입장은 그것을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외려 운가의 대공자 운녹산(雲綠山)이 숙이라면 땅에 이마를 댈 수밖에 없으리라. 곽자렴은, 한번 웃으면 남포현의 기녀들이 속곳 바람으로 달려들 것 같이 준수한 사내 운녹산의 얼굴에서 감도는 한기를 외면하며, 몸을 비틀어 제룡당으로 손을 뻗었다. “들어가십시다.” 운녹산은 곽자렴에게 고개를 까닥이고서 앞서 걸었다. 곽자렴은 할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라야만 했다. 뒤에서 보고 있던 청의무복의 중, 장년인 셋이 거의 동시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순간 운녹산과 동행한 두 중년인들이 그들을 차갑게 노려보다가 말없이 운녹산의 뒤를 좇았다. 표국의 외양에서 느껴지는 을씨년스러움과는 달리, 제룡당 접객방의 분위기는 단아하고 고풍스러웠다. 방 구석구석에 자리 잡은 가구며 분재며 그림이며 글씨 하나하나까지 어느 하나 예사로운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중년인들을 뒤에 서있게 하고 홀로 앉은 운녹산은 그 어디에도 눈을 두려하지 않고 그저 싸늘한 기운만 흘릴 따름이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곽자렴은 등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느끼며 혹시라도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흐르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된 것입니까, 국주님?” 운녹산이 서늘한 눈빛으로 곽자렴을 직시하며 물었다. 곽자렴은 차마 한성처럼 차갑게 반짝이는 그의 눈을 마주 응시할 수 없었다. 평소라면 그놈 참 잘 생겼다며 구석구석 뜯어볼만도 했지만, 지금의 곽자렴은 당황하여 품속을 뒤질 뿐이었다. 한참을 꼼지락대다가 겨우 손수건을 찾아낸 곽자렴이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를 훔치며 말했다. “아직은 귀가의 표물을 실은 용문비선 일호가 사라졌다는 것 말고는 그리 아는 것이 없소이다. 허나---.” “성의가 없으시군요.” 운녹산이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차갑게 곽자렴의 말을 끊었다. “성의가 없다?” 곽자렴은 운녹산의 말을 되풀이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남에게, 그것도 새파랗게 젊은 후배에게 들어야 할 말이 아니었다. 곽자렴은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사천 물산의 흐름을 유심히 살피다가 삼협운송이 곧 성공의 열쇄임을 찾아내어 지난 삼십 년 간을 쉬지 않고 일했었다. 그 결과로 오늘날의 용문수로표국이 사천 이대 표국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었다. 표국과 관계된 것이라면 말 못하는 용문비선의 돛대마저도 그의 손에서 윤이 날 정도로 정성을 다했다. 성의 없다.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결코 들을 일이 없는 말이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변할 수 없는 입장이 되어버린 곽자렴의 심정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그 물건이 무엇인지는 아실 터. 이미 본가에 도착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모르신다? 성의 없다는 제 말이 지나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만.” 다시 이어진 운녹산의 말에 곽자렴은 한숨을 내쉬는 것 말고는 달리 대응할 방도가 없었다. 차라리 천금을 들여 보상해 줄 수만 있다면 자신의 눈앞에 앉아서 건방 떠는 젊은 놈에게 호통을 쳐보리라. 그러나 불행하게도 운가으로부터 의뢰를 받은 물건은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백련정강(百鍊精剛)으로 만든 철검 이백자루! 병기에 대해서 웬만큼 아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갸웃거릴 일이었다. 신병(神兵)이라 소문난 절검(絶劍)이 아닌 이상, 상질의 검이라 하더라도 그 거래가격이 삼백 냥을 넘는다면 제 값 이상의 가격을 치루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산술적으로 운가의 표물가격을 최고로 잡아준다 하여도 은자 육만 냥에 불과했고, 위약금으로 세배를 지불한다 하여도 이십만 냥을 넘지 않는다. 그 정도라면 용문수로표국이 충격을 받아도 휘청거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철검의 값어치는 그렇게 단순히 산술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철검 이백자루는 확실히 시중에 나도는 보통의 검과는 달랐다. 탁탑참요검(托塔斬妖劍)이라 했다. 왜 이백 자루나 되는 검을 새로이 주조하게 되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요괴를 퇴치하는 천장(天將) 탁탑천왕(托塔天王)의 오대신병 가운데 하나인 참요검을 빈 검명(劍名)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일반의 용도와는 다른 주술적인 힘이 깃들어 있으리라. 곽자렴도 표물을 맡기 전부터 이미 사천의 사대거두 가운데 한 사람이며 천북제일무가 운가의 가주인 무극신검(無極神劍) 운검정(雲劍正)이 그 검에 얼마나 큰 공을 들였는지 들어 알고 있었다. 운검정이 직접 상질의 철을 구했고, 보통 사람이라면 얼굴 한번 보기도 힘들다는 무당파의 재전장로(齋殿長老) 보천자(補天子)가 모든 제례(祭禮)를 도맡았으며, 단지 검을 주조하기 위하여 검각현과 주조소(鑄造所)가 있는 호북성 홍호현(洪湖縣)에 탁탑천왕을 모시는 사당을 열었으며, 그것을 위해 투입된 자금만도 물경 이십만 냥에 이른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실은 철검주조를 위해 투입된 시간이었다. 오년!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사천 사대 세력의 하나인 천북제일무가의 가주가 장장 오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린 끝에 나온 결과물이 탁탑참요검이었다. 그런 물건을 잃어버렸으니 곽자렴으로서는 용문수로표국을 내어 놓으라 해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곽자렴은 일언반구도 하지 못한 채 흥건하게 젖은 손수건을 다시 이마로 가져갔다. 그리고 눈길을 비틀어 꽉 닫힌 방문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용문수로표국의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남포 포구도 예전과 달리 썰렁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물론 잔뜩 찌푸린 하늘이 예고하는 것처럼 곧 우기가 시작되면 남포현은 근 두 달이나 포구의 기능을 상실하는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포구에 실어달라고 기다리는 화물들을 볼라치면 정작 포구가 썰렁한 이유는 용문수로표국에 있는 것이리라. 그렇게 한적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움마저 감도는 포구로 팔노등선 한 척이 힘겹게 들어서고 있었다. 바람이 없는 탓에 물길을 역행해야 하는 사공들의 노질은 무척이나 힘들어 보였지만 사공들은 이상하게도 기운을 돋우는 말이나 노래조차 없이 묵묵히 노질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배가 마침내 포구에 닿았다. 선수에서 선타를 잡고 있던 털북숭이 중년인이 사람은 없고 화물만 가득한 포구의 전경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선수 근처에 돌돌 말려있던 밧줄의 끝을 잡고 선착장에 올라섰다. 그리고 익숙한 솜씨로 밧줄을 선착장의 말뚝에 고정시키고 배 쪽을 향해 말했다. “올라오게.” 오른쪽 팔에 부목을 댄 창백한 얼굴의 청년 하나가 노수들의 부축을 받으며 선착장으로 올라섰다. 중년인이 청년을 다시 부축했다. “가세.” 중년인이 청년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청년은 그 말을 무시하고 힘없는 눈으로 포구의 전경을 둘러보았다. 환희가 흐르고 슬픔이 겹치며 괴로움으로 비틀린 그의 눈에서 결국 두 줄기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살아버렸구나. 살아서 이 땅을 다시 밟을 줄이야. 나 혼자서 이렇게---.” 청년의 감정을 이해하여 기다려 주던 중년인이 다시 청년을 잡아끌었다. “장오! 서둘러야 하네. 아버님께서는 지금 자네가 절실하게 필요하실 걸세.” 용문비선 일호의 유일한 생존자인 장오는 복잡한 감정을 정리하듯 한숨을 내쉬고서 중년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국주! 왔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외침을 듣자마자 곽자렴은 의자가 넘어질 정도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곽자렴은 방안에 운녹산과 말없는 두 중년인이 있다는 것마저도 잊고서 방문으로 달려갔다. 곽자렴이 막 문을 여는 순간 두 사람이 방문 앞으로 다가섰다. 곽자렴은 털북숭이 사내의 어깨 너머로 언뜻 엿보이는 왜소한 청년의 얼굴을 확인하고서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장오? 너 장오가 아니냐?” 털북숭이 중년인은 말없이 곽자렴과 장오의 사이에서 비켜섰다. 장오는 놀람과 기쁨이 동시에 감도는 곽자렴의 얼굴을 마주 대하자마자 억눌러두었던 참괴함이 터져 올라 자신도 모르게 무릎 꿇었다. “국주님! 으허허허헝! 이 놈만 살아 돌아왔습니다. 으허허허헝!” 곽자렴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물 흥건한 장오를 바라보다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장오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일어나라. 이렇게 울지만 말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다오.” 도대체 몇 번이나 정리했는지 모른다. 곽자렴을 만나게 되면 논리정연하게 설명하기 위해 떠올리기도 괴로운 그 날의 일들을 수백수천 번이나 더듬어 혹시라도 빠진 부분이 없는지 점검했었다. 그때마다 자신의 비겁함마저 떠올라 몇 번이나 울고 또 울었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막상 곽자렴의 얼굴을 대하자마자 정리해 두었던 말들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오로지 혼자 살아왔다는 자괴감과 표사답지도 무인답지도 못했던 비겁함만이 떠올라 한 마디도 뱉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내막을 모르는 곽자렴은 장오의 울음이 쉽게 멈출 것 같지 않아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그의 등 뒤에서 운녹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회의 기쁨은 뒤에 나누어도 될 것 같습니다만.” 얼굴을 보지 않아도 어떠한 표정을 하고 있는지 확연히 알 수 있는 싸늘한 음성이었다. 곽자렴은 눈을 감고 고개를 살래 흔든 후에 털북숭이 사내에게 고개를 돌렸다. 털북숭이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 죽어가는 걸 파동(巴東)에 사는 어부가 구했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막은 오는 도중에 다 들었습니다.” 곽자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냐? 그럼 네가 먼저 들어오너라.” 곽자렴은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바닥에 이마를 대고 있는 장오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후에 방안으로 들어갔다. 곽동량(郭棟亮)이 그 뒤를 따랐다. 곽동량은 그가 조사하고 뒤에 장오로부터 들은 사건의 전말을 차분하게 보고했다. 곽자렴은 만자강과 표사들이 모두 죽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사색이 되어 눈을 감았다. 그러나 몇 번의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곽동량에게 물었다. “허면 토가족 사람들은?” 곽동량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 일을 해주는 토가족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삼협 근동에 흔히 보이는 토가족 사람들마저 종적이 묘연합니다. 아마도 모두 부락으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곽자렴이 난감한 눈빛을 드러내며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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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공이라 부르는데. 어쨌든 알아는 주네. 끝까지 몰라줬다면 섭섭할 뻔했어.” 만자강은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아득한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마공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으리라. 정도의 공력이 오행기(五行氣)를 두루 다독이고 조화시켜 성취를 이루는 반면에, 유독 오행의 한 기운만을 취하여 극대화시키는 무공들이 있다고 들었다. 바로 오행마공(五行魔功)이 그것이었다. 정공이든 마공이든 간에 그 성취는 익히는 사람의 자질에 따라 다르겠지만, 비슷한 자질에 비슷한 수련기간이라면 같은 대성의 경지가 아닌 바에야 한 가지 기운만을 파는 마공 쪽이 우월하리라. 계수마공은 오행기 중에서도 특히 수의 기운을 극대화시킨 무공인데, 오늘 만자강은 수의 기운이 천지를 감싸는 장강의 격류 앞에서 계수마공의 주인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만자강은 전신을 옥죄어드는 암담함을 뚫고 바로 흑면사내에게로 쇄도했다. 금리도천파의 신법으로 빠르게 흑면사내의 앞까지 이른 만자강은 검을 잇달아 다섯 번이나 내뻗는 해파압천지(海波壓天地)의 수법을 펼쳤다. 푸른빛 검파가 파도처럼 겹겹이 쌓이면서 흑면사내를 향해 뻗어나갔다. 흑면사내는 그 가공할 공세 앞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노는 듯 수편을 장강에 그대로 담가두고 오직 왼손만을 연달아 휘돌렸다. 일류 요리사의 손끝에서 밀가루 반죽 한 덩이가 순식간에 원반이 되듯, 흑면사내의 왼손 앞에서 움찔대던 물 덩어리가 투명한 방패가 되어 사내의 전면에 펼쳐졌다. 첫 검파가 흑면사내를 내리눌렀다. 팡! 검파와 물로 이루어진 방패가 부딪치는 순간 요란한 소리가 나며 물줄기가 흩어졌다. 흑면사내는 조금씩 뒷걸음질치면서 손을 오므렸다 펴기를 연속적으로 반복했다. 파파팡! 흑면사내의 움찔대는 손놀림에 따라 흩어진 물방울들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다시 뭉치고 넓게 펼쳐져 연이은 검파를 무리 없이 막아나갔다. 네 번째 검파마저 수막을 뚫지 못하는 순간 만자강은 금리도천파를 거두고 급히 두 발로 갑판을 찍어 물러설 준비를 했다. 그때 흑면사내의 오른손도 움직였다. 사내의 병기 끝에 매달린 수편이 둥그렇게 반원을 그리며 만자강의 등판을 찍었다. 그러나 공격할 때 이미 방어를 염두에 두고 있던 만자강은 두 발을 즉시 교차하였다가 펼쳐 뒤로 휘돌면서 검을 내쳤다. 천류직하(川流直下)! 검 끝에서 피어난 예리한 기운이 투명한 뱀의 머리를 쪼개어버렸다. 다시 물줄기가 흩어지는 순간 만자강의 등 뒤에서는 해파압천지의 마지막 기운마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그의 발아래 흩어져 있던 물방울들이 다시 흑면사내를 향해 또르르 구르기 시작했다. 만자강은 숨 한번 쉬지 못한 채 몸을 휘돌려 사내로부터 멀어졌다. 다시 일장 반에 이르는 거리를 확보하고 사내를 바라본 만자강은 상대의 병장기 끝에 매달린 물기둥이 현저하게 짧아진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사내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했고, 만자강은 온천지에 물뿐인 장강의 한 가운데 있었다. 흑면사내는 만자강의 눈빛을 관통하는 암울한 기운을 읽고서 싱긋 미소 지었다. 사내는 왼손 앞에서 여전히 굼실대는 물 덩어리를 손을 휘저어 둥그렇게 펼쳤다. 조금 전과는 달리 지름 한 자 정도의 작은 원반을 만든 흑면사내는 웃는 가운데서도 매서운 눈빛으로 만자강을 바라보며 다섯 손가락을 계속해서 튕겼다. 순간 원반에서 수십 개의 물방울들이 분리되어 빛살처럼 만자강을 향해 뻗어나갔다. 만자강은 이빨을 악다물고 검을 휘둘러 칠십이파검의 구명절초 가운데 하나인 파랑성벽(波浪成壁)을 펼쳤다. 수십줄기 검기들이 만자강의 전면에 펼쳐지자 만자강의 신형이 마치 바다 속에 있는 듯 보였다. 투투투투투투툭! 기와지붕에 우박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파랑성벽에 물방울들이 부딪혀 수십 개의 포말들이 부서져나갔다. 그와 함께 만자강의 얼굴도 일그러지고 그의 신형 역시 조금씩 뒤로 밀려나갔다. 순간 흑면사내는 왼손을 오므려 넝마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수막을 한데 모았다. 그리고 다시 만자강을 향해 내뻗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주먹 반 만한 물 덩이가 약해진 파랑성벽을 두드렸다. 팡! 하얀 포말이 터졌다가 물안개 되었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 순간 만자강의 신형도 실 끊어진 연이 되어 뒤로 날아갔다. 쿵 소리와 함께 만자강이 돛대 하단부에 부딪쳤다가 주르륵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만자강의 입가에서 한 줄기 핏물을 흘러내렸다. 만자강은 절망 속에서도 마지막 기운을 뽑아내어 힘겹게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보아야 했다. 흑면사내가 자신을 향해 병기를 내뻗고 있음을. 으아아아합! 만자강은 기합이라고는 할 수 없는 괴성을 내질러 흑면사내를 향해 달렸다. “흠! 투지라 해야 하나, 아니면 발악?” 흑면사내는 차갑게 말하고서 내뻗은 병기를 연이어 내질렀다. 순간 병기의 구멍에서부터 유리처럼 투명하고 실처럼 얇은 한자 가량의 수전이 연달아 발사되었다. 파파파파파팟! 만자강의 가슴과 어깨와 두 다리를 파고든 투명한 수전이 그의 배후에서 붉게 변하여 튀어나왔다가 힘을 잃고 갑판으로 떨어져 핏물로 화한 순간, 만자강도 무릎을 꿇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피가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입을 쩍 벌린 채, 만자강은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흑면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싱겁잖아. 하긴 옥로현진공(玉露玄眞功)이 없는 속가의 칠십이파검으로는 역시 무리였지?” 사내의 말이 끝나는 순간 만자강의 신형도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표두우!” 조마조마한 심정을 부여잡고 돛대의 앞쪽에 모여 만자강의 분투를 바라보던 오량과 두 표사들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절규했다. 만자강이 죽은 탓만은 아니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죽음까지 결정된 때문이었다. 그들의 절망감을 알고 있다는 듯, 흑면사내는 혀를 차보인 후에 그들을 외면하고 선실과 난간 사이의 좁은 통로로 발길을 옮겼며 지나가듯 말했다. “너무 놀았어. 빨리 치우고 돌아가자.” 흑면사내가 좁은 통로로 사라지는 순간 어피인들이 오량 등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흑면사내가 미처 통로를 다 지나치기도 전에 욕설이 터지고 세 마디 비명이 연속적으로 들렸다. 통로를 완전히 빠져나와 선미의 좁은 갑판에 첫발을 디딘 흑면사내는 선타를 잡은 채로 완전히 얼어붙은 장오를 바라보며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수고하네. 피곤할 텐데 그거 이제 내가 맡을까?” 막역지우(莫逆之友)라도 흑면사내처럼 친근한 어조로 말하지 못하리라. 장오는 그 어조에 오히려 심장이 오그라들 것만 같았다. 흑면사내가 두 발짝 앞까지 다가섰다. 장오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 오른손을 뻗어 도파를 잡고 도를 뽑아야 했다. 그러나 그의 육신은 그의 의지를 배반하고 있었다. 통나무처럼 뻣뻣한 몸으로 겨우 움직인다는 것이 선타를 놓고 배의 후미 난간 쪽으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것뿐이었다. 흑면사내는 싱긋 웃으며 장오가 조금 전까지 서있던 곳에 이르러 등을 보이면서 선타를 잡았다. 그때 첨벙이는 소리가 연속하여 여섯 번이나 들렸다. 그리고 타타닥 소리가 들렸다. 장오는 자신도 모르게 좌우로 눈길을 돌렸다. 아무도 타지 않은 팔보등선 두 척이 격류를 타고 구당협의 입구로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동료들이 다 떠난 모양인데, 거기 계속 있을래?” 또 다시 친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오는 쉽게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바로 번개가 머리를 관통하는 듯한 충격을 받으며 사내가 한 말의 진의를 깨달았다. 여섯 번의 첨벙이는 소리. 모두가 떠난 것이었다. 영혼은 남겨둔 채로. 그의 우상 만자강마저도. 장오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 혼란스러웠다. 너무나 여유 있게 등을 보이고 있는 상대를 향해 가차 없이 도를 날리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도를 빼기는커녕 도파조차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대로 있다가는 결국 자신도 동료들과 같은 처지가 되리라는 것쯤은 지금의 정신상태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꼼짝도 못하겠는데. 이 놈의 손은 왜 이 모양인거야? 좀 움직여 봐.’ 장오는 힘겹게 왼손을 움직여 오른손을 꼬집었다. 하지만 꼬집는 왼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오른손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들부들 떨릴 뿐 움직여 주지는 않았다. 그때 다시 친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을 한번 시험해 보지 그래? 혹시 알아? 동료들과는 다른 처지가 될지.”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흑면사내가 나타났던 그 통로를 통하여 어피인 한 명이 나타났다. 그는 장오를 없는 사람인 듯 무시하고 흑면사내에게 말했다. “준비 끝났습니다.” 흑면사내가 조금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좋아. 돌아간다.” 그때서야 어피인이 장오를 바라본 후에 손에 감추어 들고 있던 아미자를 꺼내 보였다. 그리고 허락을 구하는 듯 다시 흑면사내를 응시했다. 흑면사내는 어피인을 향해 오른손을 들어 보이고 다시 친근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도 빨리 결정해. 배를 돌린 후에는 귀찮아도 손을 써야하니까.” 장오는 구당협으로 빨려 들어가는 격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배의 앞머리에서 갈라진 물살들이 배의 후위에서 다시 합쳐지는 선미 너머의 격류를 내려다보았다. 수십줄기 물살들이 하나로 뒤엉키면서 부글거리고 움푹 파이고 때로 치솟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마귀의 입을 보는 것만 같았다. 휘리리리릭! 소리에 놀라 다시 고개를 돌린 장오의 눈에 살기를 물씬 풍기며 휘도는 아미자와 어피인의 차갑게 번들거리는 눈빛이 동시에 잡혔다. 장오는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장오의 입에서 주르륵 피가 흘렀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오른손을 들어 상의 가슴어림의 바느질 자리를 움켜쥐고 눈을 감으며 상체를 난간 너머로 제쳤다. 첨벙! 흑면사내가 물소리를 듣고서 싱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쯧쯧쯔, 아직 세상 단맛도 다 못 본 어린 녀석이던데---.이 격류 속에서 살아날 수 있을까?” 한편 물속에 빠진 장오는 오로지 본능적인 움직임에 몸을 맡겨 겨우 수면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채 한 모금의 숨조차 돌리지 못하고 다시 격류에 휘말렸다. 물질은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장오였지만, 삼협의 격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피부가 찢어져 조각조각 떨어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입을 벌려 다시 한모금만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격류는 거대한 뱀처럼 그의 전신을 친친 감아 옥죄며 점차 더 깊은 강 속으로 끌어내렸다. ‘제기랄! 이렇게, 이걸로 끝인 거야? 어차피 죽을 목숨인 것, 마지막은 사내답게 장식해야 했는데---.’ 격류의 주둥이가 숨통을 깨물어버린 듯 호흡이 가빠왔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장오의 입에서 한줄기 물거품이 터져 나왔다.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물거품 속에서 주름진 얼굴이 떠올랐다. ‘엄마!’ 용문수로표국의 표사가 되어 처음으로 표사복을 입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속만 섞이더니 이제야 제 밥벌이는 할 모양이라며 장하다고 어깨를 두드리는 아비와는 달리, 그의 어미는 한동안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다가 결국 집밖으로 뛰어나갔다. 잔칫상은커녕 저녁밥조차 거르게 되어 장오와 그의 아비가 어미를 놓고 툴툴대고 있을 때, 마침내 그의 어미가 돌아왔다. 배고프니 밥 달라는 부자의 간절한 요청을 일언반구도 없이 무시해버린 그녀는 붉은 글 같은 것이 써진 노란 종이를 유지에 꼭꼭 싸더니 장오의 표사복 앞섶에 넣어 정성스럽게 바느질 했다. 무엇이냐 물었더니 하백의 가호(加護)를 얻은 피수부(避水符)라고 했다. 장오가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눈살을 찌푸리자 그의 어미는 거금 세 냥을 들인 것이니 반드시 영험이 있으리라 말했었다. 점차 또렷해지는 모친의 영상과는 반대로, 물속에서 절로 일그러지는 장오의 얼굴에 이상한 미소가 떠올랐다. ‘거봐, 엄마! 세 냥, 눈뜨고 사기 당했잖아.’ 장오는 몽롱해지는 정신을 애써 붙잡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울고 싶다. 남포현(南浦縣)은 사천의 남동쪽 장강 변에 위치한 포구다. 이곳을 기점으로 하여 동으로 점차 물살이 거세져 기문에 이르고 거기서부터 바로 삼협이 시작된다. 바깥으로 나가려는 사천의 물산들은 결국 남포현에 모여 배를 기다리고,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온 물산들 역시 남포현에 와서야 한숨 돌리고 사천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천사람들은 남포현을 사천의 동쪽 문이란 뜻으로 천동문호(川東門戶)라 칭했다. 천동문호라는 표현에 어울리게 남포현에는 작지 않은 표국이 다섯이나 있으며, 사천의 타 지역에서 몰려드는 표대(鏢隊)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뜨인다. 그러니 그와 관련한 상인, 하역부, 잡부들이 바글거렸고 다루, 객잔, 창루에서 일하는 사람들 역시 많을 수밖에 없다. 거기에 그들 전체를 관리하고 통제하면서 연명해가는 관원들까지 포함하면, 현에 불과한 남포지만 번잡함으로 따진다면 사천의 성도(省都)인 성도(成都) 못지않은 것이 당연하리라. 사람들로 차고 넘치는 남포현의 중앙대로 천중로(天中路)를 따라 포구 쪽으로 가다보면 상인, 표사, 잡부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다루와 술집들이 줄을 잇고 그 뒤쪽으로 간간히 호쾌한 웃음소리와 간드러진 교성이 들려오다가 갑자기 뚝 끊긴다. 그리고 나타나는 것이 규모는 크나 외향에 별 다른 신경을 쓰지 않은 다섯 채의 큰 집들이다.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으나 유독 대문만큼은 크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그 집들은 드러나지 않는 또 다른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집들의 주인들과 드나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종의 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표국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천중로의 일부라 생각지 않고 그곳만 따로 떼어 집표로(集鏢路)라고 불렀다. 이러한 표국끼리의 군집은 특이하다 할 것이다. 동종의 작은 상점들이 함께 손님을 끌고 손님들은 선택의 여지를 가질 수 있다는 이유로 옹기종기 붙어있는 경우가 많으나, 표국은 다르다. 무인과 상인의 중간에 위치하는 그들은 출신 문파에 따라 영역을 정해 두고 거리를 두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경쟁을 한다 해도 이웃으로 붙어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표로가 형성된 것은 이곳 남포현이 천동문호인 탓이고, 표국의 표국이라 할 수 있는 용문수로표국이 있는 탓이기도 했다. 용문수로표국이 나머지 네 표국들의 청탁을 받아 외부로부터 표물들을 실어오면 나머지 표국들은 남포현을 기점으로 하여 내륙의 동, 북, 서 그리고 수로의 서쪽을 각각의 영역으로 지키며 다시 표물을 운송한다. 그러니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한 사이가 나쁠 이유가 없었고, 그 결과로 집표로가 생긴 것이었다. 표국도 이윤을 추구하는 장사인데 어떻게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 수 있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으나, 용문수로표국이 청성에 배경을 둔 것과 같이 나머지 네 표국들도 아미(峨嵋), 운가(雲家), 또는 당가(唐家) 등의 명문명가를 배경으로 둔 탓에 함부로 영역을 침범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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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열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장중하게 들려오던 전사의 노래가 갑자기 뚝 끊겼다. “빠탐!” 만자강은 선수 쪽에서 들려오는 그 한 마디 외침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빠탐? 온다는 뜻이던가?” 만자강은 의혹어린 눈빛으로 타노를 응시했다. 하지만 타노는 만자강을 보지 않고 바로 소리를 질렀다. “헤이가!” 헤이가? 만자강이 알기로는 가라는 뜻이었고 더더욱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용문비선이 삼협을 오가는 배 가운데 가장 큰 축에 속한다 해도, 길이 칠장에 너비가 길어 봐야 이장이 조금 넘었다. 그 안에서 가 봐야 어디를 가겠는가. 만자강은 자신이 뜻을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앞쪽에서 첨벙, 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왜 저러는 거야?” 표사들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만자강은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표사들이 왜 당황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미 그의 머리 위에서 거대한 돛이 방향을 잃고 펄럭이고 있었고 배는 요동을 치고 있었다. 만자강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구당협의 입구를 향해 수십 개의 사람 머리들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만자강은 타노를 찾았다. 타노는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았다. “미안하오.” 만자강은 그 슬픈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타노는 선미의 난간에 등을 기댄 채 슬프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만자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자강은 타의 반대쪽에 서서 타를 움켜쥐고 타노에게 외쳤다. “왜?”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는 말을 아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구려. 하! 그간 용문수로표국 덕에 우리 일족들이 풍요롭게 살 수 있었는데, 이렇게 인연을 끊어야 하다니---. 미안하오. 목숨 값은 목숨으로 치르는 법. 이 늙은이는 살고자 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저 아이들은 살고자 할 것이오. 살아날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그들의 목숨으로 당신들의 피 값을 갚을 것이오.” “타노오! 무슨 뜻이오?” 만자강의 외침은 공허했다. 대답해야 할 타노가 지그시 눈을 감고서 뒤로 넘어졌다. 첨벙! 지금껏 어안이 벙벙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장오는 급히 선미의 난간으로 달려가 타노를 살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배로 인하여 갈라졌던 물살들이 다시 한데 뭉쳐 생기는 소용돌이와 거품뿐이었다. “장오! 돛을 잡으라, 이르고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햇!” “예? 옛!” 만자강은 뒤뚱거리며 선수 쪽으로 달려가는 장오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제기랄! 삼협을 다 빠져나왔거늘! 용문수로표국의 코앞까지 왔는데 이런 일이---.” 선체가 부서질 듯 흔들렸다. 만자강은 고개를 들어 돛을 살폈다. 드디어 바람을 맞이하는 정 방향으로 돛이 세워졌다. 단 한번도 돛을 잡아본 적이 없는 표사들이었지만 수년간 본 것이 있으니 어렵지 않게 돛의 위치를 잡아낸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순풍에 돛을 달았다 해도 삼협의 격류 앞에서는 전진이 불가능했다. 오히려 제 자리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버거우리라. 배가 앞으로 나아가는 추진력은 순전히 노에서 얻어지는 것이었다. 기껏해야 미숙한 솜씨로 서너 개의 노밖에 저을 수 없는 상황이니 이제 배는 삼협의 입구에서 옴짝달싹 못할 상황에 빠진 것이었다. 만약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격류에 휩쓸려 암초에 받히거나 뒤집히거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리라. 만자강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언뜻 떠오른 것은 현 지점에서 기다리는 것과 배를 돌려 다시 삼협을 내려가는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기다리는 것도, 배를 돌리는 것도 현실적으로 모두 불가능했다. 바람이 머리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기다린다는 의미는 상실될 것이다. 배를 돌린다는 것은 더더욱 힘들어서 단순히 타를 트는 것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격류의 틈새를 넘나드는 절묘한 조타술과 함께 그에 호응하는 숙련된 돛의 운용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했다. 함부로 행하다가는 배의 넓은 옆구리가 격류에 휩싸여, 방향을 트는 순간 전복되기 십상이었다. 만자강은 제 삼의 선택을 했다. “조금씩! 조금씩! 강변으로 붙인다. 닻을 내리고 기다린다.” 좌초되더라도 최소한 표물의 안전을 확보하고 표사들의 목숨까지 구할 수 있는, 만자강으로서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만자강은 좌우를 둘러보고 더 가까워 보이는 왼쪽 벼랑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평소에는 절경이라 감탄했던 곳이었으나 이제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 내리쳐질 것만 같은 거대한 천도(天刀)를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만자강은 크게 심호흡하고 지그시 눈을 감으며 가끔씩 들려 준 타노의 무뚝뚝한 음성을 떠올렸다. 물결을 느껴야 한다고 했다. 물의 흐름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때가 느껴진다고 했고 손이 절로 움직인다고 했다. 그랬다. 즉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심으로 느끼려 하니 물소리도 없고 표사들의 당황한 목소리도 없었다. 오직 너울거림에 동화되어가는 만자강 그 자신뿐이었다. 만자강은 선타를 잡은 손에 불현 듯 힘이 들어감을 느꼈다. “표두우!” 장오의 경악에 찬 울부짖음이 만자강의 청정경(淸淨境)을 깨버렸다. 만자강은 선타를 비틀려던 힘을 빼고 눈을 떴다. 선실 옆 좁은 통로를 막 벗어난 장오가 사색이 되어 만자강과 시선을 마주쳤다가 손을 뻗어 선수를 가리켰다. “수-수적이---.” 만자강은 당황했다. 삼협에 수적 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었다. 누가 있어 삼협의 격류 앞에서 당당할 것인가. 용문표국은 삼협을 통하는 사천의 물류(物流)를 거의 독점하고 있다 할 정도로 많은 표물을 운송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우 여섯 명의 표사들이 표선을 호위하는 이유는, 그들의 운송로가 삼협에서 가까운 남포현에서부터 삼협의 끝이라 할 수 있는 호북성 의창까지, 수적질을 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호호탕탕한 격류 팔백 여리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오의 눈빛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재차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배의 양쪽 옆구리에서 무엇인가 부딪히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면서 선체가 급격하게 휘청거렸다. 투투투투투투퉁---! 갑판에 우박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잇달아 들리면서 선체가 좌우로 쉬지 않고 흔들렸다. 만자강은 갈등했다. 수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틀림없이 많은 수의 인원들이 배에 승선했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할지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선타를 아무 것도 모르는 장오에게 맡기고 가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먼저 배를 안전한 곳으로 이끌어 놓아야 할지 망설여졌다. 바로 그 순간, 채채챙! 도검 뽑는 소리가 들리면서 욕설이 이어졌다. 만자강은 아득한 심정이 되어 눈을 감았다. 차라리 쌀 천 섬, 비단 천 필이나 옥 노리개 천 개라면 이렇게 암담하지는 않으리라. 용문수로표국의 재력이라면 손실로 인한 충격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지금 만자강이 운송하고 있는 것 중에는 돈으로 되갚아 줄 수 있는 성질의 물건이 아닌 것도 있었다. ‘아직 바람이 바뀔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선부가 아니라 표두! 표물의 안전이 우선이다.’ 만자강은 각오를 다지고 눈을 부릅떴다. 그는 장오에게 급히 말했다. “선타를 잡아라. 당황하지 말고 흐름에 맞추어 이 상태를 유지하도록 노력해 봐. 만약 위기가 닥치거든 그때는 생사(生死)는 하신께 맡기도록.” 장오는 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생사를 하신에게 맡긴다 함은 격류 속에 몸을 던지라는 뜻이리라. 하지만 동료들을 놓아두고 홀로 살겠다고 물 속에 뛰어들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장오는 자신의 대견한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으려 했다. 그러나 만자강은 장오가 선타를 인계받기도 전에 등에서 검을 뽑아들고 선실 위로 솟구쳤다. 장오는 급하게 휘돌아가려는 선타를 보고 엉겁결에 움켜쥐었다. 겨우 선타의 안정을 되찾은 장오는 문득 어미의 얼굴을 떠올리며 청의경장의 앞섶을 내려다보았다. 촘촘한 바느질 자국이 보였다. “이 따위 것에 의지할 이 장오가 아니야.” 장오는 입술을 깨물면서 상의 앞섶을 외면했다. 그러나 선타를 잡고 있는 손은 쉼 없이 떨리고 있었다. 장오는 경련이 이는 듯한 손을 부릅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이빨을 악다물고 상체로 선타를 눌러 지탱하고 오른손을 왼쪽 허리로 돌려 도파를 힘껏 움켜쥐었다. 표사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용문수로표국의 인기는 압도적으로 높다. 그것은 단지 용문표국이 사천내륙에 위치한 표국들로부터 독점적인 위치에서 의뢰를 받는 표국 위의 표국인 탓만은 아니었다. 들어가기는 어렵지만 일단 용문수로표국의 표사가 된 후라면 급여가 후할뿐더러 편하기 때문이었다. 용문표국표사가 표물에 주의를 기울이며 바짝 긴장할 때는 의창에서 짐을 실은 후부터 서릉협의 초입에 들어서거나 서릉협에 들어서서 의창에 짐을 내리기 전까지 삼십 여리의 짧은 거리 안에서 뿐이었다. 용문표국의 표사 칠년 차인 마두 오량은 오늘 같은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남과 병장기를 부딪칠 일은 장난칠 때뿐이라고만 생각하고 살았었다. 요즘은 쓸데없는 뱃살을 빼기 위해 다시 연무라도 시작해 볼까 생각 중이었는데, 지금 오량은 죽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바로 조금 전 팔노등선 두 척이 격류를 타고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어피(魚皮)와 같은 몸에 밀착되는 요상한 흑의를 입은 사내들이 세 발가락으로 된 갈고리로 비선의 옆구리를 찍어 배를 갖다 붙였다. 막을 새도 없었다. 표사 다섯이 좌우에서 쉬지 않고 솟구쳐 오르는 스물이 넘는 인원들을 어찌 막을 것인가. 표사 다섯 가운데 둘은 여전히 돛 끝에 달린 화장(火杖)을 한 손으로 움켜쥔 채 품속에 오른손을 넣고 있었고, 오량을 포함한 나머지 세 사람은 그들을 보호하려는 기색으로 도파를 움켜쥐었다. 기묘한 흑의를 입은 사내들은 등에 삼지창과 같은 기이한 무기를 맨 채 양손 중지에 한 자가 채 못 되는 아미자를 꽂아 빙글빙글 휘돌리며 표사들을 압박할 뿐, 공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오량은 그들의 얼굴에서 비웃음을 느끼면서 이빨을 악다물었다. 그래도 무서웠다.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정도로 무서웠다. 하체가 풀려 넘어질 정도로 두려웠다. ‘손들어버리면 살려줄까? 그래, 놈들이 원하는 것은 표물이지 목숨이 아니야. 우리 뒤에 누가 있는데. 대청성(大靑城)이 버티고 있어. 감히 목숨까지야---.’ 살고 싶다는 욕구가 표사로서의 의무를 압도해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검은색 어피의에 버금가는 검은 안색의 사내가 어깨에 희한하게 생긴 검을 걸친 채 느긋하게 배 위로 올라섰다. 이제 서른이나 된 듯한 그 사내가 갑판의 대치국면을 흘끔 바라보고는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누구 기다려? 얼른 죽여 버리지 않고 뭐하는데?” 툭 던져버린 그 한마디에 한 가닥 삶의 희망을 떠올리던 오량은 질끈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자마자 오량은 도파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가했다. 채채챙! 두 동료들이 따라 병장기를 뽑는 순간 화장을 잡고 있던 두 표사들 역시 품속에서 손을 빼냈다. “도적놈의 새끼들!” 쉐에엑! 용문수로표국의 표사들이 주로 애용하는 광한표(光扞鏢) 열 자루가 좌우로 빛살같이 날아갔다. 순간 오량과 다른 두 표사들도 앞으로 튀어나갔다. 어피의의 사내들은 전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중지에서 느릿하게 돌던 아미자를 맹렬하게 휘돌리며 손을 앞으로 내뻗을 따름이었다. 파르르르륵, 휘도는 아미자는 너무나 빨라 아미자가 아니라 원형의 작은 방패를 내미는 것 같았다. 티티티티팅! 열 자루의 광한표가 좌우로 퉁겼다가 속절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오량 등은 암담한 심정이 되어 도에 실었던 날카로운 벽력개산(霹靂蓋山)의 기세를 잃었다. 어피의의 사내들은 너무나 쉽게 오량 등의 도검을 피해내고 휘돌리던 아미자를 세워 내질렀다. 수십 줄기 예리한 기운들이 사방에서 닥쳐오자, 오량은 팔비도룡(八臂屠龍)의 수법으로 도와 함께 선풍처럼 휘돌며 갑판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동료들의 처지도 오량과 다름이 없는 듯 했다. 모두가 갑판의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심지어는 돛대를 지탱하던 두 사람마저 화장을 놓아버린 채 오량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다섯 사람이 작은 원을 그리려는 순간, 훼르르르르륵,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작은 돌풍들이 휘몰아쳤다. 오량 등은 그것의 정체도 미처 확인하지 못한 채 미친 듯이 병기를 휘둘렀다. 치치치치치칭! 크으으윽! 다섯 사람이 사력을 다해 펼친 도풍검풍(刀風劍風)도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아미자의 폭풍을 모두 감당해 내지는 못했다. 오량이 왼쪽 어깨에 아미자를 깊숙이 장식한 것을 필두로 모두들 한 두 개의 아미자를 몸 어디엔가 꽂은 채 비명을 토해냈다. 표사 두 명이 넘어지면서 배도 비명을 질렀다. 역류 속에서도 떠밀리지 않고 견뎌낼 수 있게 해 주던 풍신의 힘을 잃는 순간 배가 뒤집어질 듯이 휘청거리며 뒤로 밀리는 기색을 보이는 것이었다. 선수의 난간에 느긋하게 기대어 서있던 흑면 사내가 주저앉을 듯한 육신을 바로 잡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유! 놀라라. 야! 뒤집어질 때까지 기다릴래? 돛부터 잡아. 무섭잖아, 자식들아.” 어피인 두 사람이 흉흉한 기색을 거두고 돛으로 다가가 표사들이 놓았던 화장을 움켜쥐었다. “야! 빨리 끝내. 뭐야? 다섯 놈 밖에 안되구만 왜 그렇게 빌빌 매고 있어?” 다시 소리친 흑면 사내는 찡그린 얼굴로 배 전체를 훑으며 중얼거렸다. “뭐야? 비천언가 뭔가 하는 놈이 표두라더니만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아! 그렇지. 조타 중이겠구만.” 바로 그 순간 아미자 대신에 삼지창 같은 수차(水叉)를 꺼내든 어피인들이 오량 등에게로 쇄도했다. 요동치는 배 위인데도 불구하고 어피인들은 발바닥에 빨판이라도 달린 듯 안정된 자세를 잃지 않고 미끄러지듯이 전진했다. 오량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남은 이들은 자신을 포함하여 셋. 상대는 티끌만한 상처조차 없는 스물하나의 괴인들이었다. 이제 죽음은 확정되어 있었다. 어피인 너머 흘끔 강물을 바라본 오량은 힘겹게 기를 모으며 하늘을 향해 애원했다. 살려달라고. 그러나 보이는 것은 무자비한 수차의 흐릿한 경기뿐이었다. 오량은 전신을 난자할 것 같은 기운을 향해 사력을 다해 도를 휘둘렀다. 가가가가강! 힘겹게 돋운 기운이 허무하게 가로막혔음을 깨닫는 순간 오량은 모든 것을 포기했다. 이제 좌우에서 몰려드는 기운에 산적이 되기만을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때였다. 전신을 갈가리 찢어놓을 것만 같던 기운들이 그의 머리카락들을 곤두서게 만들면서 허공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크아아아! 자신이 내뱉지 않은 것이 틀림없는 비명 소리에 눈을 치뜬 오량은 어피인들이 분분히 물러서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피를 뿌리며 배의 난간에 부딪혔다. 어찌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아! 멋지군, 정말 멋져! 암향표(暗香飄)에 칠십이파검(七十二波劍)인가?” 이제는 익숙한 흑면사내의 말을 듣는 순간 오량은 누군가가 그와 흑면사내 사이의 시야를 가리며 떨어져 내리는 것을 확인했다. 본능적으로 도를 휘두르려 했다. 그러나 연달아 들려오는 괜찮냐는 말에 급하게 힘을 빼고 외쳤다. “표두!” 오늘따라 만자강의 등이 왜 이렇게 넓어 보인단 말인가. 평소에도 오량은 만자강을 성실함의 표본이요 무인의 귀감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 자신은 그렇게 될 자신이 없었지만, 그가 아니면 누구를 존경할 수 있을 것이냐고 말하고 다녔다. 그렇지만 그 어느 때보다 더 만자강이 크게 보이는 것은 지금의 절망과 공포 속에서 오직 그만이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만자강은 야속하게도 그의 검 한 자루에 목숨을 내걸고 있는 오량과 두 표사들을 살펴보지도 않고 단 한 마디 말만 내뱉었다. “견디게!” 오량 등은 만자강이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견디면 산다! 믿고 있었다. 평소에는 거리낌 없이 술자리를 같이 하고 음담까지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지만 또 일면으로는 자신들과는 차원이 다른 인물이 바로 만자강이었다. 이제 그가 복수의 검을 떨쳐 동료들을 죽이고 자신들에게 상처 입힌 수적들을 갈가리 찢어발기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오량 등의 의심 없는 믿음과는 달리 만자강은 암담했다. 암향표에 몸을 싣고 선실을 뛰어넘어 청성칠심이파검 가운데서도 가장 익히기 어렵다는 검파난첩(劍波難疊)의 절초를 십성 전개했다. 그것은 허를 찌르는 공격이어서 반 수 이상을 무력화시키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결과는 달랐다. 오량 등이 살아남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어피인들은 기습을 당해 놓고도 단번에 검파난첩의 기운을 느끼고 공격을 수비로 전환해 내었다. 결과적으로 단 두 명의 어피인들만이 다시 일어서지 못했고 나머지는 최소한의 손해를 보는 것으로 검파난첩을 받아넘긴 것이었다. 만자강은 선수의 난간에서 벗어나 어깨에 걸치고 있던 검을 늘어뜨리는 흑면사내를 주시했다. 암향표에 칠십이파검을 알아보면서도 놀라기는커녕 입가에 천진난만한 미소를 띠며 박수를 보내는 인물, 바로 그가 수적들의 우두머리였다. 그의 웃음은 만자강을 당혹감 속으로 빠뜨렸다. 웃는 가운데서도 점차 매서워지는 그의 눈매를 다시 확인한 만자강은 표두로서의 임무를 못다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빠져들었다. 바로 그 순간, 잠시 물러섰던 어피인들이 서서히 다가서고 있었다. 만자강의 검에서도 푸른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피어올라 검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니들 뭐야? 저 양반은 내 손님이야, 내 손님. 니들 건 그 뒤에 있잖아, 자식들아. 물러서.” 흑면사내가 눈살을 찌푸리고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어피인들을 훑어보자 어피인들이 배의 난간 쪽으로 물러섰다. 흑면사내는 만자강의 검신에서 감도는 기운을 살펴보고 싱긋 미소를 지었다. 흑면사내는 흔들리는 갑판을 평지 걷듯이 뚜벅뚜벅 걸어 만자강과의 거리를 일장으로 좁혔다. 그는 곧장 검을 들어 만자강을 향해 뻗었다. 순간 누그러졌던 만자강의 검에서 시퍼런 청기가 다시 꿈틀거렸다. “아차! 이런 멍청이!” 사내는 흑색 가죽 검갑이 검을 감싸고 있음을 확인하고 훌쩍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만자강을 향해 환한 미소를 보이고는 그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어피인을 향해 검을 뻗었다. 특별히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겨누는 것만으로 검갑이 앞으로 부드럽게 튀어나갔다. 어피인이 검갑을 받아들자 흑면사내는 다시 만자강에게 검을 뻗으며 두 발짝 앞으로 걸었다. 만자강은 눈살을 찌푸렸다. 기이하기는 해도 검갑이 감싸고 있는 상태에서는 분명히 검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검신이 드러난 순간 사내의 검은 이미 검이 아니었다. 세상의 빛을 모두 흡수한 듯한 무광택의 흑색 검신에는 검인(劍刃)이 없었다. 또 예리한 검첨이 달려있어야 할 곳 역시 손가락 하나는 들어갈 것 같은 검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만자강의 눈길이 자신의 검첨에 닿아있음을 본 흑면사내는 다시 한번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자! 이제 한번 해 볼까? 기대만큼은 했으면 좋겠는데---.” 흑면사내가 갑자기 무기를 강으로 내뻗었다. 순간 하신이 수전(水箭)이라도 뿜은 듯 누런 강물 한 줄기가 튀어 올라 흑면사내의 병기 구멍과 맞닿았다. 만자강은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펼쳐 보이는 신기한 광경 탓이 아니었다. 그 안에 숨어있는 상대의 경지가 예사롭지 않았던 탓이었다. 장강의 물줄기를 순식간에 끌어들이는 능숙한 접인공(接引功)에, 채찍과 같은 가느다란 물줄기의 형상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이물성형(以物成形)의 공력이 겸비되어야 가능한 경지였다. 그렇게 만자강이 당혹감에 휩싸여 있을 때, 쉐엑! 귀청이 서늘해지는 소리와 함께 흑면사내의 병기 끝에 매달린 수편(水鞭)이 강물과 단절되면서 만자강을 후려쳤다. 만자강은 아차 하는 그 순간 오른발로 오량을 선실 쪽으로 밀어내며 그 탄력으로 허공으로 치솟았다. 근 삼장에 달하는 물줄기가 성난 수룡이 되어 만자강의 발바닥을 스치고 지나갔다. 흑면사내는 허공을 휘도는 만자강을 바라보며 싱긋 미소를 짓고서 병기를 미약하게 흔들었다. 한 치 안에서 오가는 작은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병기의 끝에 달려 꿈틀대는 물줄기는 천지 사방을 난자했다. 만자강은 갑판에 발 디딜 틈도 없이 허공에서 정신없이 휘돌고 또 돌았다. 선풍처럼 휘돌아 상대의 정신을 빼놓고 소리 없이 접근하여 상대를 죽음 앞까지 내몬다는 청성의 신기 암향표가 한낱 물줄기를 피하는데 쓰이고 있었다. 방금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던 물줄기가 다시 만자강의 허리를 물겠다고 달려들었다. 만자강은 발로 허공을 후려차서 물줄기와의 거리를 유지했다. 동시에 검을 내뻗어 심천무파(深川無波)의 쾌속한 초식으로 물줄기를 후려쳤다. 물줄기에 버금가는 굵은 청기가 물줄기와 맞부딪쳤다. 팡!